본문 바로가기
종교사_자료/영상

학문적 강의와 종교적 청중

by 방가房家 2023. 6. 3.

팔만대장경에 대한 KBS 다큐 <다르마>(2011) 제1편의 한 장면. 이 다큐는 오랜 세월 팔만대장경을 연구한 미국인 학자 랭커스터 교수의 강연 내용을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아래의 장면은 랭커스터 교수가 승가대에서 승려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는 모습이다.
나는 그의 강연을 한 번 들은 적이 있어 내용을 대강 알고 있다. 승가대의 강연 내용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 짐작된다. 강의 내용은 불교 경전이 담겨온 매체의 발달사, 그 중에서도 획기적인 성취를 이룬 팔만대장경, 앞으로의 매체의 발달과 새로운 개념의 불경에 대한 전망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위의 영상에서도 랭커스터 교수는 승가대 학생들 앞에서 그런 내용을 강의하고 통역을 통해 전달된다. 학생 스님들은 눈을 반짝이며 강의를 듣는다. 긴장감이 충만하다. 강의가 끝난 후 한 학생이 질문을 한다.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랭커스터 교수는 엷게 미소를 지은 후 대답을 시작한다.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입니다.”

 
 

진지한 만남이다. 하지만 이 엄숙함 이면에는 심각한 엇박자가 존재한다. 선생은 학술적인 내용을 강의하고 학생은 종교적인 질문을 던진다. 선생이 부처님 말씀이 전해지는 형식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를 소개하니까 학생은 부처님 말씀의 내용을 묻는다. 둘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질문을 받은 랭커스터 교수의 미소에서 나는 약간의 체념이 섞여 있음을 본다.(철저히 내 느낌이다) 그는 이런 반응에 익숙하다는 듯이 그에 맞는 대답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원하는 대화의 내용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내겐 익숙한 풍경이다. 종교학이 강의되는 자리에서, 특히 그것이 대중적인 자리일 때 이런 엇박자는 어김없이 발생한다. 그래서 나는 위의 사례를 그저 학생이 선생의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넘기기 보다는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아래 이야기에서 랭커스터 교수를 비판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난 그의 편이니까. 다만 최근에 하고 있는 생각과 연동이 되어 약간 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1) 학자가 궁금해 하는 것과 대중이 궁금해 하는 것은 다르다. 그러다 보니 서로에 대한 이해가 떨어질 때가 많다. 랭커스터 교수의 강의를 학생들이 잘 수용했을까? 난 회의적으로 본다. 교수가 뭐라 하든 그들은 진리의 문제가 궁금했을 뿐이다. 질문에 대한 답변에 학생들이 만족했을까? 난 이 역시 회의적으로 본다. 승려들의 입장에서 불교 진리에 대한 이 서양 학자의 이야기는 피상적인 것으로 들리지 않았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서로의 자리가 서로에게 만족할 답변을 주기 힘들게 설정되어 있었다.
(2) 종교학은 이러한 일을 늘 겪는다. 아니 학문 일반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문적 물음과 대중의 관심이 같을 수는 없으니까. 
(3) 그러면 이대로 놓아두어도 좋을까? 이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입장이 갈릴 것이다.
최근에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과 이런 고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있다. 종교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뜨거운데 종교학이 이에 대해 제대로 된 답변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에 대한 고민이었다. 대중들의 물음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자는 것이 그 선생의 제안이었다. 중요한 생각이다. 원래 학문은 그런 거라고 손 놓고 있기에는, 종교학의 학문적 기반은 너무 취약하다. 종교학 발전의 자양은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종교학을 달가워하지 않는 종교의 지원을 받아서? 턱없는 이야기다. 종교학이 학문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자양은 대중적 관심에서부터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귀를 가져야 한다.
(4) 그럼에도 둘은 서로 다른 것을 궁금해 한다. 그 평행선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나는 종교학이 종교적 대중의 물음에 일치하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양쪽의 대화의 길, 서로의 관심을 서로에게 알려줄 수 있는 대화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