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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메모

감염된 언어, 감염된 종교

by 방가房家 2023. 6. 3.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를 읽으면서 내가 느낀 저항감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워낙 깔끔한 문체와 유려한 논리로 쓰인 책이기 때문에 그런 점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비슷한 전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한국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은 내가 종교 영역에서 혼합현상(syncretism)에 대한 논문을 썼을 때 이야기하고 싶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그땐 내게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겨웠다.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풀어내는 것은 고도의 글쓰기 능력이다. 그때 이 분의 글을 읽었다면 흉내라도 낼 수 있었을 것을.
나는 종교학(사실상 신학)에서 ‘혼합주의’에 쏟아지는 욕설을 막아보려고 했다. 그래서 이름도 ‘혼합현상’으로 고쳐 짓기도 했다. 그러면서 언어학에서 크레올화(-化, creolization)라는 예를 가져와서 설명에 보태기도 하였다. 그리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어를 둘러싼 논쟁에 순수/깨끗함의 추구라는 문제가 존재했음을 깨닫지 못했다.

종교사에서 만남과 섞임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언어 역시 그러하다.

 
한 언어 안에 외래 요소가 상당히 들어와 그 언어가 잡탕 언어가 되는 것도 별난 일도 무서운 일도 아니다. 그것은 한국어가 아스라한 옛날의 탄생 이래 끊임없이 겪어온 일이기도 하다. 
[고종석,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2007), 92]
 
그러므로 순수에 대한 열망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한 꿈이다. 그것은 현상이 아니라 믿음이다.
순수에 대한 열망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우리가 그 순수한 언어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99)
순혈주의의 속살은 아집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게다가 섞임과 스밈은 문화적 생물학적 진화의 피할 수 없는 요건이다. ‘순수한 한국어’라는 것 역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깨비다. 설령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순수한 한국어’만으로 이뤄진 언어 체계는 흉측하기 짝이 없는 전체주의의 언어일 것이다. 아름다운 순수어를 고집하는 마음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움은 섞임과 스밈 속에, 불순함 속에 있다.(104)

고종석은 ‘섞임과 스밈’이라는 글에 ‘언어순수주의에 거는 딴죽’이라는 부제를 부였다. 이를 흉내낸다면 혼합현상에 대한 나의 글은 ‘순수정통주의에 거는 딴죽’이 될 것이다. 순수정통주의는 종교사에서 권력을 가진 이들이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지향이며, 한국 종교사에서는 더욱 유난하다. 흔히 드는 예로, 한국의 성리학, 선불교, 개신교(거기에 북한의 주체사상을 포함시키기도 한다)는 원산지보다도 더 지독한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한다. 장로교회에서는 자신이 정통 캘빈주의 신학을 계승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다.(하지만 ‘Cavin’이 ‘캘빈’으로 발음되는 것은 미국물 많이 먹은 개신교 내부의 관습이다. 이 언어 자체가 정통성의 모호함을 상징한다.)
고종석은 서문에서 순수성의 지향이 가지는 정치적 위험을 경고한다.
언어순결주의, 즉 외국어의 그림자와 메아리에 대한 두려움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박해, 혼혈인 혐오, 북벌(北伐), 정왜(征倭)의 망상, 장애인 멸시까지는 그리 먼 걸음이 아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순화’의 충동이란 흔히 ‘죽임’의 충동이란 사실이다.(30)
물론 순수함을 추구하는 것이 타자에 대한 배척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그리 먼 걸음이 아니다’라는 표현은 적당하다. 언어순결주의는 ‘민족’을 단위로 하는 반면에 순수정통주의는 자신의 종교 집단을 단위로 한다. 그 정치적 위험은 언어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그것은 피비린내 나는 종교사가 증언하는 바다. 가까운 사례 하나만 들어보면, 한국 근대불교사를 극도로 혼탁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정화’(淨化)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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