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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

책이라는 물질과 학문

by 방가房家 2023. 6. 2.

1.
내가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푸른역사, 2007)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대목은 책이라는 물질적 존재가 학문을 일으키는 바탕이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일깨우는 장면들이었다. 특히 한국 성리학의 발달이 책의 공급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얼핏 보면 유물론적일 수도 있는) 필자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우리 상식으로는 고려 후반인 1300년경 성리학이 전래됐고, 성리학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아 1392년 조선이 건국된 것으로 알고 있다. 성리학 전래로부터 약 100년 이후 성리학에 입각해 조선이 건국됐으니, 건국 당시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해다. 1300년경에서 1392년까지 전래된 성리학 서적은 <<사서집주>>, <<근사록>>, <<주자가례>> 등 몇 종에 지나지 않았고, 그 이해의 수준도 낮았다.(87)
사정이 좀 나아진 것은 세종 때(1419년) <<성리대전>>을 들여오면서 부터였다. 그러나 주자의 전 텍스트가 완전히 소개된 것은 성종 7년에 당시 새로 간행된 <<주자대전>>을 구입한 후이다. 조선에서 이 책을 처음으로 소화한 이는 퇴계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주자학자’ 이황은 43세 이전까지는 <<주자대전>>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43세 이후에야 병을 핑계로 귀향해 95책 분량의 <<주자대전>>을 독서하고 그 결과는 <주자서절요>에 요약하였다. 결국 우리나라 주자학의 최고봉은 ‘주자의 전집을 다 읽은 사람’이었다는 싱거운 결론을 내리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된다. 물론 사상의 형성을 그렇게 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도대체 사상을 펼칠 밑천이 되는 책의 존재가 없는 학문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주자의 주요 텍스트만 갖고 있고, 그 텍스트가 형성되기까지의 지적 과정과 신유학 형성 당시의 지적 흐름을 알려주는 책들은 존재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텍스트 하나만 죽어라 파도 그 학문의 수준은 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내가 성리학의 수준을 이야기할 처지는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렇다.

2.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 2장에는 ‘불교의 철학적 성질’을 논하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만해는 동서양 철학이 결국은 불교와 합치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칸트, 베이컨, 데카르트, 플라톤, 루소, 육상산, 왕양명의 사상을 열거하며 이들의 주장이 불경과 통함을 보이고자 한다. 그 결과 “철학이 동서 고금에 있어서 금과옥조로 삼아온 내용이 역시 불경의 주석 구실을 하고 있는데 불과함”(28)이라고 단언한다.

만해의 불교 호교론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내 눈에 띈 것은 그가 인용한 서양 학자들이다. 사실 그가 서양 철학자들을 접한 것은 양계초의 저서 <<음빙실문집>>을 통해서였다. 그는 1908년 경 양계초의 저작을 접했던 것으로 보이며, 설악산 오세암에 머물며 책들을 탐독하고 1910년에 <<조선불교유신론>>을 완성하였다. 다시 말하면 만해는 서양 철학자들의 저서를 직접 접한 것이 아니라 양계초의 요약을 통해 접했던 것이다. 그래서 만해는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덧붙여 놓았다.
“그러나 나는 서양 철학자의 저서에 관한 한 조금도 읽은 바가 없고, 어쩌다가 눈에 띈 것은 그 단언척구가 샛별과도 같이 많은 사람의 여러 책에 번역 소개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전모를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27)

양계초의 책 한 권만 갖고 서양 사상의 줄기를 나름대로 파악하여 독창적인 주장에 사용한 만해의 지적 능력은 놀랍다. 그러나 그보다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1차 자료를 절대로 접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름대로 소화하고 사상을 형성해야 했던 척박한 하드웨어이다. 그것이 우리 근대 학문의 태생적인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기에 만해의 아쉬움에 가슴이 아프다.

3.

채필근의 <<비교종교론>>은 한국인에 의해 저술된 거의 최초의 종교학 교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의 머리말에는 ‘사과의 말씀’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처음 쓰려고 할 때에는 책 이름을 “종교학 개론”이나 “비교종교학”이라고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쓰기를 시작하고 보니 우선 참고서적을 얻을 수가 없고 또 기억력이 작년 때보다 쇠퇴해져서 학자들의 이름이나 연대나 그 학설의 내용이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 그러므로 책 이름을 종교학이라고는 붙일 수 없는 줄로 깨닫고 “비교종교론”이라고 일컫기로 합니다.(16)

그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말한다.
6-25 동란을 당하고 1-4 후퇴를 기회로 하여 5천여 권의 서적 전부를 다 내버리고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맨손으로 겨우 벗어 나온 사람으로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을 이해해 주실 줄 믿습니다. 더욱이 부산에서는 참고서적도 얻어 볼 수가 없었던 만큼 유감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1959년 부산시 서구 동대신동에서(17)

채필근은 겸손한 성품의 학자라고 생각된다. 그의 책은 서구의 종교학 내용을 정리한 노트의 느낌을 주지만, 구석구석에는 단순한 정리를 넘어 자신의 사유를 살붙여놓았음을 볼 수 있다. 나는 그의 저서가 ‘이론사적인’ 가치로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이론적인’ 가치를 지닌채 유통되고 있으며, 신학교를 중심으로 해서 그의 책이나 다를 바 없는 “비교종교학”들이 다른 저자들에 의해 재생산되고 있는 현재의 척박한 지적 풍토를 보면 굉장히 화가 난다. 하지만 그것이 채필근에 대한 유감은 아니다. 채필근은 자신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했던 한국 종교학의 선구자 중 한 명이며, 더구나 자신의 한계를 뚜렷이 자각한 인물이었다.
채필근은 일제말기부터 활동하여 해방 후에도 강의를 했지만, 물질적 한계로 인하여 해방 이전의 공부로부터 발전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었다. 더구나 ‘부산’이라 책을 구할 수 없었다는 대목에서 더 가슴이 아프다. 인터넷 서점 이후에야 해소 되었지만 십년 전만 해도 서울 와서 책을 구하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않았던가.(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지방 서점들의 저항 때문에 교보문고의 진출도 잘 안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책이 있어야 사상이, 학문이 가능하다는 말은 상식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의외로 울림이 큰 말이다. 그간 한국의 학문을 지탱한 것은 불법 복제를 기반으로 하는 제본집들이었으며, 알라딘과 아마존이 학문에 끼치는 영향은 당장 측정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동의해줄만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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