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진들을 사용하여 올린 발표용 포스트. 무라야마 지준의 사진을 모아 낸 책 <<한국, 1930년대의 눈동자>>의 서평으로 쓴 것인데, 내용이 다소 확대되어서 사진 자료를 통해서 한국 종교를 어떻게 읽을지에 대해서도 좀 건드리는(건드리고 싶어하는) 글이 되었다. 화면이 커서 글을 읽기엔 좀 산만하겠지만...
일제 사진을 통해 읽은 민속종교
무라야마 지준(사진), 노무라 신이치(해설), 고운기 옮김,
<<한국, 1930년대의 눈동자: 무라야마가 본 조선민속>>(이회, 2003)
1. 사진으로 종교를 읽다
최근 종교학계에서는 시각 자료를 통해 종교를 읽어내려는 관심이 늘고 있다. 대표적 예로는 사진을 통해 미국 대공황기의 종교생활을 섬세하게 읽어낸 맥다널(Colleen McDannell)의 <<신앙을 찍다>>(Picturing Faith)를 들 수 있다.1) 그녀는 1930년대 말 미국 정부 주도로 수집된 사진 자료들을 재해석하여 당시 일반인들의 일상 속에 담긴 종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제강점기 때의 관학자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남긴 사진들을 편집한 <<한국, 1930년대의 눈동자>>는 이러한 흐름에서 주목할 수 있는 작업이다. 책을 펴낸 노무라 신이치(野村申一)는 게이오 대학의 한국 민속학 교수이다. 무라야마가 남긴 앨범은 유족에 의해 게이오 대학에 기증되었고 우연히 노무라에게 전달되었다. 노무라는 1920년대부터 30년대의 것으로 생각되는 400여장의 사진들 중에 215장을 선정해 디지털 작업을 통해 선명하게 복원하여 학술지에 공개하였다.2) 그리고 그 한국에서는 고운기의 번역을 통해 2003년에 이 책으로 출간되었다.
일차적으로 이 저작은 과거를 시각적으로 복원하였다는 데서 자료적 가치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사진들 중에는 지금은 사라진 민속을 담은 것들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가치는 단순한 자료제공을 넘어선다. 노무라는 “한눈에 [보기엔] 인정머리 없어 보이는 흑백사진”(300)들을 놓고서 “식민지 조선의 기층문화라는 시간 속에서 대화”를 함으로써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생생히 읽어내고자 하였다. 그것은 사진을 구성하는 제국주의의 시각이라는 맥락에서 벗어나 종교문화의 이해라는 새로운 맥락에 자료를 위치시켜 ‘이야기’를 끌어내는 시도로서 가치가 있다.
2. 카메라의 시선과 종교의 대상화
버리스(John P. Burris)는 <<종교의 전시>>(Exhibiting Religion)를 통해서 종교가 보여진다는 것이 연구 대상으로서의 종교 개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었다.3) 1851년 영국 대박람회와 1893년 시카고 콜럼비아 박람회의 분석을 통해서 ‘종교의 전시’가 19세기 말 종교가 인종학과 진화론의 맥락에서 논의될 수 있었던 개념적 변화를 나타내고 또한 촉진했다는 것이다. 이 연구가 시사하듯이 ‘종교의 대상화’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누구에 의해 어떻게 대상화 되었는가?”
일제 강점기 때 촬영된 사진 자료에 대한 최근 연구들에서는, 그 사진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된 피사체 조선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이 잘 밝혀지고 있다. 왼편 사진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진행된 유리건판 사진전인 <<그들의 시선으로 본 근대>>에서 전시되었던 것이다. 네 명이 굿을 ‘재현’해 보이고 있고, 바로 뒤에는 아키바와 아카마쓰가 순사와 함께 지켜보고 있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 때 제작된 사진들에 담긴 권력의 시선의 구도를 잘 보여주는 사진이다.4)
권혁희는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에서 일제 강점기에 유행한 사진엽서들을 통해서 권력의 시선이 어떻게 조선의 풍물을 대상화하였는가를 분석한다. 특히 그는 무라야마가 소장한 사진들 중에도 조선 총독부에서 간행한 관광 팸플릿이나 사진엽서의 이미지와 유사하거나 일치하는 것이 많다는 점도 지적한다.5) <<한국, 1930년대의 눈동자>>에도 실려 있는 아래 그림들(그림78, 그림204)이 그 예이다. 권혁희가 분석한 내용은 노무라의 해설에서는 지적되지 않았던 것으로, 그에 따르면 이 사진들은 무라야마가 직접 찍은 것이라기보다는 엽서용으로 제작된 사진을 구입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1930년대의 눈동자>>에도 권력의 시선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사진들이 포함되어 있다. 1934년 송석하의 보고 이후 널리 알려져 1936년 조선총독부 문서과 활동사진촬영대가 파견되었던 봉산탈춤의 공연 장면(사진118)에는 경암루 앞에 앉아서 공연을 보고 있는 총독부 관료들의 모습이 보인다. 안동의 차전 사진(사진96) 하단에는 일렬로 지키고 있는 경찰들이 보인다. 노무라는 해설에서 이러한 사진 내의 시선들을 환기시켜 줌으로써 사진의 맥락을 전해준다. 그는 사진이 자연스러운 상태를 포착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이들 사진에서는 사람들의 표정도 제의의 현장도 어디나 굳어 있다.”(271) 그래서 제주도 물맞이(사진66)에 대한 해설에서는 “사진의 남자들의 표정은 무라야마의 사진에서는 보기 드물게 부드럽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3. 사진으로 한국 종교를 읽다
책 말미에는 “무라야마 지준 론(論)”이라는 글이 실려 있어 긴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저자는 무라야마의 생애를 상세히 고찰한 후, 1941년에 무라야마가 일본으로 귀국한 것에 대해서 나름의 견해를 덧붙인다. 자료가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정황과 무라야마 글의 추이로 볼 때 “무라야마에게 주어졌던 총독부 안에서의 ‘역할’은 1937년 10월에 시작하는 국민정신총동원의 즈음에 실은 끝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시 ‘미신’을 연구했던 아키바나 아카마쓰와 같은 학자들이 일제 말 처했던 상황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저자는 무라야마의 각 저서들을 초기작 <<조선의 복장>>부터 마지막으로 <<조선>>의 편집장으로서 남긴 글까지 하나하나 상세히 검토하며 평가를 시도한다. 무라야마의 지적 여정에 대한 고찰은 위에서 언급한 사진의 맥락에 대한 저자의 의문, “여기에는 왜 웃음이 없는 것일까?”(272)에 대한 답을 에둘러 찾는 과정이다. 무라야마 저작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구도는 다음과 같다.
무라야마의 모든 서술은 비록 몇 천 페이지를 쓴다 해도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구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곧 일본과 조선은 동일계통의 문화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쪽은 누습에 빠져 뒤떨어진 조선, 한쪽은 개화하여 약진하는 일본이라는 기본적인 축이 있고, 이런 전제를 세워나가면서 조선을 옛 폐단으로부터 해방시켜, 이윽고 내지의 일본인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수준까지 선도해 나간다는 구도가 엄연히 있었던 것이다.(266)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본 조선 민속은 ‘미신’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무라야마의 사진에 존재하는 것은 “맹인과 무당을 위로부터, 바로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세계로서 바라보는 도식이다. 바꿔 말하면 여기에는 맹인이나 무당이 귀신과 교류하는 모습이 빠져 있다.”(277) 이러한 도식을 극복하고 사진을 새로운 맥락에서 제공하기 위해 노무라가 한 것은 무엇일까?
작은 것부터 이야기한다면, 사진의 제목(캡션)들이 미묘하게 바뀐 것을 들 수 있겠다. 권혁희는 사진엽서에 붙어있는 제목들이 사진의 사실적 이미지를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선언하는 위력을 지닌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6) 이것은 무라야마 사진들에도 적용된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노무라는 사진을 다시 제시하면서 미세하게나마 제목을 수정하고 있다. 그 변화는 크지 않다. 대부분의 제목들은 무라야마의 제목을 유지하면서 그것을 요즘 학계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바꾸거나 잘못된 정보를 수정한 것들이다. 그런 수정들은 정치적 효과를 노린 것이라기보다는 정확성을 기하려는 꼼꼼한 태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7) 저자가 제목에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은 해설 마지막에 괄호로 무라야마 책에 있던 원래 제목을 일일이 밝혀놓았다는 데서 드러난다. 제목의 변화 중에는 추상적인 것을 다소 구체화 한 것들이 있으며[예를 들면, ‘해녀’를 ‘잠수의 옷차림’으로(사진61), ‘결혼식’을 ‘합근례’로(사진14), ‘혼인’을 ‘교배례’로(사진13), ‘무당의 권청 받는 귀신’을 ‘덕물산 위의 최영 장군과 애첩’으로(사진177)], 특히 <<조선의 습속>>의 사진들의 인종학적인 관점을 수정한 것은 위에서 말한 정치적 효과를 제거하는 역할은 한다. ‘앉은 모습(남자)’를 ‘가장’으로 바꾼 것(사진34), ‘남녀의 모습’을 ‘부부’로 바꾼 것(사진35), ‘업은 모습’을 ‘일하는 여성’으로 바꾼 것(사진30), ‘부인이 앉은 자세’를 ‘그림을 그리는 여성’으로 바꾼 것(사진31)이 그 예이다.
사진에 대한 무라야마의 시선과 노무라의 시선이 갈라지는 가장 중요한 대목은 사진의 배열에 있다. 노무라는 215매의 사진을 ‘죽음과 의례’, ‘결혼과 아이’, ‘하루 하루의 삶’, ‘농사와 놀이’, ‘생활 속의 귀신’, ‘신과 비나리’의 여섯 토막으로 나누어 실었다. 이로써 무라야마 저작의 체제가 해체되고 종교문화의 이해를 의도하는 새로운 체제 아래 재편되었다. 이러한 재배치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다섯 번째 토막 “생활 속의 귀신”이다. 여기에 실린 사진들은 대부분 무라야마의 <<조선의 귀신>>의 제2부 “양귀(禳鬼)편”에 실렸던 것들이다. 무라야마의 원래 책에서는 두창(痘瘡), 말라리아, 티푸스, 설사, 콜레라, 백일해, 악질 등의 병을 물리치기 위해서 동원되는 ‘미신적인’ 방법들의 실례로 제시되었다. 구타(毆打)법, 경압(警壓)법 등으로 시작해 수십 가지의 방법들을 나열하는 무라야마의 서술은 ‘원시인’들의 주술을 공감주술, 접촉주술 등으로 세분화하여 기술하는 프레이저의 태도와 비슷하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질병이라는 공포에 대한 조선 민중의 무지, 무지에서 비롯된 절망적인 ‘미신들’이다. 사진은 그 무지의 상태를 증언하는 자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양귀편”이 아니라 “생활 속의 귀신”에 실린 사진들은 귀신이 한국 민중들의 삶의 경험과 소통하며 어떻게 존재해왔는가를 탐구하기 위한 것들이다.
4. 더 읽어야 할 것들
“인정머리 없어 보이는 흑백사진”을 독자들에게 보여준 후, 노무라는 “바란다면 이들 사진을 자유롭게 다시 늘어놓아 읽고, 역사 속에 묻힌 ‘이야기’를 파내 주시기를.”(300)이라는 마지막 소회를 남긴다. 그는 사진을 정성껏 배열하고 무라야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는 했지만 해설은 간략하게 하였다. 이 책에는 독자들이 사진에서 이야기를 끌어내도록 하기 위한 여백이 함께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아직 이 사진들에서 읽어내지 못한 것들이 많음을 고백해야 겠다. 민속종교에 대한 무지로 인해 그저 그림구경만 한 것도 많았다. 특히 내가 사진을 통해 처음 접해 신기했던 것들을 몇 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장례 행렬에 사용되었다고 하는 방상씨(사진2, 3), 천연두로 죽은 사람을 나무 위에 장사지내는 풍습(사진8), 감기를 낫게 하는 새끼줄 목걸이(사진26), 조점(鳥占)을 치는 모습(사진28, 29), 인형놀이에 사용된 옷(사진33),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 말머리에 씌운 광안(光眼)(사진74), 액을 쫓는 제옹 인형(사진91, 92), 치병 주술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방법들(사진137-64).
비록 무라야마 사진을 읽어내는 작업이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사진집을 비롯한 일제의 사진 자료의 정리 성과를 바탕으로 비교 작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말 일제하 시기의 다른 외국인 관찰자인 서양인, 특히 선교사들의 사진 자료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시선의 차이와 그 차이가 빚어낸 자료의 양상에 대한 비교 작업이다. 아직 서양인들의 시각 자료는 엘리자베스 키스의 회화들이 정리된 것을 제외하고는 잘 정리되지 않았다.8) 최근에 선교사들의 사진 자료에 대한 정리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을 계기로 해서,9)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의 사진 자료들도 공개되고 있다.10) 이 자료들을 통한 종교 읽기 작업과 그 안에 담긴 시선들에 대한 비교작업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1) Colleen McDannell, Picturing Faith: Photography and the Great Depressio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4).
2) <<자연과 문화>> 66(일본 내셔널트러스트, 2001. 3. 15). 또한 노무라는 “무라야마 지준 소장사진선”( http://www.flet.keio.ac.jp/~shnomura/mura/index_kr.htm)이라는 웹페이지를 통해서 사진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 페이지는 한국어와 일본어로 제작되어 있으며, 현재는 작은 크기의 사진만 볼 수 있다.
3) John P. Burris, Exhibiting Religion: Colonialism and Spectacle at International Expositions, 1851-1893 (Charlottesville: University Press of Virginia, 2001).
4) 서울대학교박물관, <<그들의 시선으로 본 근대>>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4), 67.
5) 권혁희,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민음사, 2005), 56. 그리고 60-61쪽에 있는 사진. 58-59쪽에 있는 도리이 유조의 사진과도 비교해 볼 것.
6) 권혁희,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109.
7) 사진19는 인왕산 국사당 뒤에 있는 선(禪)바위의 모습이다. 제목은 ‘서울 인왕산 기자암 손바위’이며 무라야마가 원래 붙였던 제목은 ‘경성 부부암’이다. 선바위는 원래 기자(祈子) 신앙의 중심지였고 일제 때 국사당이 옮겨옴에 따라 민간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요즘에는 인왕사가 들어서서 불교적 공간으로의 전유(專有)가 시도되고 있는 곳이다. 요컨대 성스러운 장소를 놓고 민간신앙과 불교의 경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인데, 그런 점에서 볼 때 지금은 ‘선바위’라는 불교적 명칭이 통용되고 있지만 무라야마는 이곳을 기자신앙의 맥락이 강한 ‘부부암’으로 기록해 놓았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런데 노무라가 이곳을 ‘손바위’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선바위의 오기인지, 손바위로 부르는 전승이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8) 엘리자베스 키스 & 엘스펫 K. 로버트슨 스콧, 송영달 옮김,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코리아: 1920~1940>> (책과함께, 2006).
9) Kathryn T. Long, ""Cameras 'never lie'": The Role of Photography in Telling the Story of American Evangelical Missions," Church History 72-4 (Dec., 2003): 820-851. 롱은 이 글에서 사진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선교사 저술에서 사진이 활용된 방식을 정리해서 소개하고 있다. 한편 미국 대학 도서관들에서는 소장하고 있는 선교사 사진들을 정리해서 전시하고 웹으로 공개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예일대학교 도서관에서는 아프리카 선교사들의 선교엽서를 전시하였다. “Communications from the Field: Missionary Postcards from Africa” (www.library.yale.edu/div/MissionaryPostcards.doc) 남가주 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는 선교사 사진자료를 제공한다. “The Internet Mission Photography Archive”(http://digarc.usc.edu/impa/controller/index.htm)
10) 2006년 남가주대학에서는 1908-22년에 한국에서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했던 코인 테일러 목사 부부의 사진 150여 점을 공개하였다. “The Reverend Corwin & Nellie Taylor Collection”(http://www.usc.edu/libraries/archives/arc/libraries/eastasian/korea/resources/kda-taylor.html) 또한 프린스턴 대학에서는 2001년 “Presbyterian Missionary to Korea during the 1890's-1990's”라는 전시회를 했는데, 그 사진 자료는 다음 주소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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