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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

빼빼로 먹으며

by 방가房家 2023. 6. 1.

요즘은 빼빼로가 제철이라 싱싱하고 가격도 싸다. 우리 동네 슈퍼에서는 여섯 봉다리가 든 빼빼로 큰 통을 2200원에 판다. 만족스러운 가격이라 몇 통 사와서 책장에 빼빼로를 가득 꽂아놓고 먹고 있는 중이다.
나에게는 성스러운 날 대접을 못 받고 있지만, 이 날이 의미가 있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내가 대충 봐 온 것에 따르면, 일시적 유행처럼 보였던 이 날이 해가 갈수록 사그라지기는커녕 점점 힘이 붙어 이제는 어느 정도 정착된 날로 인정받는 분위기이다. 이제 거의 십년이 된 것 같다. 이 날의 경과에 대한 한 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빼빼로데이의 유래는 1994년 부산에 있는 여중고생들이 1의 숫자가 네번 겹치는 11월 11일 친구끼리 우정을 전하며 '키 크고 날씬하게 예뻐지자'는 의미에서 빼빼로를 선물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전국으로 확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전국 확산의 배경에는 빼빼로를 생산하는 특정 제과업체의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 이후 빼빼로데이가 남녀노소 누구나 사랑과 우정,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날로까지 발전되면서 이 업체는 빼빼로데이를 전후한 3개월간의 매출이 연간 빼빼로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대 성공을 거뒀다
 
시작된 시점은 맞는 것 같은데, 다른 설명들에는 문제가 있다. 일단 대중들이 상술에 현혹된 것이라는 식의 서술 방식이 맞지 않는다. 상징이 인위적 조작에 의해 생성 가능하다는 전제 자체가 문제가 있다. 내가 알고 있기로도, 롯데 제과가 빼빼로 데이의 유행을 선도한 것이 아니다. 롯데 제과는 뒷짐 지고 있다가 유행에 행복하게 편승하였을 뿐이다. 이 날은 여고생들의 주고받음과 빼빼로의 연애 코드가 결합되어 대중의 자발적인 실천으로 생성된 날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것은 블랙 데이가 전국 중국집 주인들의 농간으로 시작된 날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빼빼로 데이가 있기 전에 빼빼로는 이미 연애라는 상징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었다. 빼빼로와 연애의 결합은 빼빼로 게임이라는 의례적 맥락에서 획득된 것이다. 빼빼로가 시장에 나온 것이 1983년이고 빼빼로 게임은 1980년대 후반에는 보급되어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롯데제과 음모론을 제기하려면 빼빼로와 연애의 결합이라는 지점에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 게임에 빼빼로가 선택된 것은 순전히 그것이 알맞기 때문이었다. 게임에 필요한 긴장을 조성하는 적당한 길이(새우깡과 비교할 때)라든지, 진행에 요구되는 깔끔함의 측면(사루비아와 비교할 때)에서 빼빼로보다 적당한 과자는 없었다.
정리하자면, 빼빼로 데이는 빼빼로 게임이라는 의례적 맥락(ritual context)에서 형성된 빼빼로의 연애 상징체계에, 부산 여학생들이 빼빼로의 형태를 날짜와 연결시킨 수비학(數秘學, numerology)적인 사유가 부가되어 생긴 날이다.
그런 결합은 애들이나 하는 유치한 발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종교 상징에서 상징물과 의미의 결합에는 그다지 심오한 이유가 없으며 위의 빼빼로의 예와 별반 다를 것 없다고 생각한다. <<정감록>>에서 정도령을 예언하기 위해 사용한 파자(破字) 놀이나 부산 고등학생의 연상이나 우열을 가릴 것이 없다. 롤랑 바르트가 <<신화론>>에서 설명해주었듯이, 신화에서 대상과 의미의 결합은 기표와 기의의 결합만큼이나 자의적(arbitrary)이다.
빼빼로 데이가 유지되는 것은 상징 논리 때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날에 기대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행위 자체이다. 다시 말해, 해마다 이 날에 되면 빼빼로를 주는 일을 행한다는 실천(practice)의 반복에 의해 남녀 간의 관계에서 의미가 생성된다. 주기적 반복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남녀 간에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해가 지나면서 그 사연들이 이 날에 주렁주렁 맺히게 되면서, 이 날은 의미있는 날로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빼빼로 싸다고 사와서 쌓아놓고 먹고 있는 나에게 성스러움의 의미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인간관계의 변화에 의해 성스러움은 언제든 부여될 수 있다. 빼빼로에 목숨거는 여친이 나에게 주어진다면, 빼빼로에 대한 나의 자유로운 태도는 상실될 것이 뻔하다.


반복이야말로 종교 의례에서 핵심적인 원리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단순하지 않고, 똑같아 보이지만 똑같지 않은 것이 이 반복이다. (여기서부터 빼빼로 데이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넘어간다.)
프로이트가 <강박 행동과 종교 행위>라는 짧은 논문에서 제시해준 것은 의례에 있어서 반복이라는 주제의 중요성이다. 의례 행위를 유아나 강박증 환자의 행위에 비교한 불경한 글이라는 불필요한 화를 삭이고 그의 의도를 잘 살펴본다면 말이다.

나는 이러한 종교 이론을 잘 설명하는 것이 타르코프스키 영화 <<희생>>의 시작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할아버지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주 먼 옛날 한 수도원에 늙은 수도승이 살고 있었단다.
그의 이름은 ‘팜배’였지.
그는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산에 심었단다. 이렇게 말야.
그리곤 제가 조안 콜로프에게 말했지.
“나무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매일같이 물을 주도록 해라.”
조안은 매일 이른 아침 물통에 물을 담아 산에 올라가서 그 죽은 나무에 물을 주고는 저녁이 되어서야 수도원으로 돌아오곤 했지.
그렇게 3년 동안 물을 주다가 어느날 나무에 온통 꽃이 만발한 것을 발견했단다.
무얼 하든 같은 방법으로 계속 하면, 의미를 갖게 되는 법이지.
만약 매일같이 정확히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면,
늘 꾸준하게 의례와도 같이 말이다.
그러면 세상은 변하게 될 거다.
암, 변하지 변할 수밖에 없어.
만약 어떤 사람이 정확히 아침 7시에 일어나
욕실로 가서 물을 한 잔 받은 후 변기 속에 붓는 일이라도 매일 계속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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