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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아프리카 유산

by 방가房家 2023. 5. 31.

미국의 인류학자 헤르스코비츠(Herskovits)는 1941년에 <<흑인의 과거에 대한 신화>>(The Myth of the Negro Past)라는 책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역사적 유산에 대한 다섯 가지 신화(허구)가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학계에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하나하나 논박하였다. 다섯 가지 신화는 다음과 같다.

1. 흑인들은 천성적으로 어린애같은 성격이라, 불만족스러운 사회 상황에도 쉽게 적응하여 그것을 기꺼이, 심지어는 기쁘게 받아들인다. 이는 노예보다는 차라리 소멸을 선택했던 아메리카 인디언들과는 반대된다.
2. 아프리카에서 보다 열등한 부류가 노예가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더 지적인 부류는 습격당했을 때 노예 상인의 덫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했기 때문에 화를 면했을 것이다.
3. 흑인들은 아프리카 전 대륙의 모든 지역에서 왔고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매우 다른 풍습을 지니며, 정치적으로는 부족의 정체성을 파괴하기 위해 신세계 각지에 흩어져야 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최소한의 이해를 위한 공통 분모나 행위도 지니지 않는다.
4. 흑인들이 부족으로 같이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또 풍습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 해도, 아프리카 문화는 너무 야만적이고 인간 문명의 너무 낮은 단계에 있기 때문에, 주인들의 우월한 유럽 문명을 보고는 자기 토착 문화를 버리게 될 것이다.
5. 그러므로 흑인들은 과거가 없는 사람들이다.

다소 장황하고 때론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논의의 초점은 미국의 흑인들에게 아프리카의 문화가 얼마나 남아있느냐에 맞추어져 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아프리카 문화의 유산이 존재하는가? “그렇다”라고 헤르스코비츠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더 나아가 미국을 형성한 것은 유럽만이 아니며, 분명 아프리카의 몫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에 함축된 바이다. 그의 주장은 학계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1950년대와 60년대까지 그와 프레이저 사이에서 미국 흑인에게 아프리카 유산의 여부를 놓고 심각한 논쟁이 있었고, 이 논쟁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종교사 연구에서 고전적인 논쟁이 되었다. 분명 미국에는, 서인도제도나 브라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아프리카 문화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아프리카 신들이라든지, 풍습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헤르스코비츠는 흑인들의 노래와 예배 때의 몸짓, 무덤 장식 등에서 아프리카 문화의 유산을 찾아낸다. 희미한 흔적을 찾아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기에 그의 주장에 대한 반론들도 만만치 않다.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아프리카 대륙에는 수백의 언어를 쓰는 다양한 공동체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노예 사냥은 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노예를 잡아온 곳은 중남부 아프리카를 포괄하는 넓은 범위에서 이루어졌다. 다른 문화에 속한 아프리카인들이 잡혀와 한 배에 가득 실려서는(위의 그림처럼 짐짝처럼 실려왔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송되었다. 게다가 미국의 경우엔 서인도 제도와는 달리 대규모 농장이 아니라 개인 지주들이 운영하는 플랜테이션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소수의 흑인 집단들이 여기저기 멀찍이 흩어져 배치되었다. 집단적으로 만나 전통을 보존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질적인 공동체 출신들이기에 자신들의 언어로 서로 소통할 수 없었다.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역사적인 가정을 통해서 이 상황을 이해해 본다. 유럽 사람들이 아시아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갔다고 상상하자.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몽골인, 베트남인, 필리핀인 등을 무작위로 잡아다가 배에 실어가서 하와이와 캘리포니아 농장에 열 명, 스무 명씩 배치했다고 생각해보자. 한두 세대만 지나도 문화와 언어는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아시아 문화를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아마 아시아인들이 그저 수동적으로 미국사람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그들은 영어로 소통할 수밖에 없지만, 아시아인들이 처해 있는 공통된 상황을 바탕으로, 그리고 몸에 새겨진 문화적 행동들을 통해 새로운 범아시아적인 행동양식을, 즉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낼 것이다. 그 새로운 문화가 중국에서 온 건지, 한국에서 온 건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아시아의 것이라고 할 만한 문화가 미국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형성한 문화가 이러한 성격을 가진다. 새로이 형성된 문화이기에, 그게 어디서 왔는지를 따지는 낡은 문화 개념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거기엔 아프리카와 연결되는 무언가가 있다. 문화에 대한 유연한 이해를 갖고 접근하면, 미국을 형성한 문화적 배경의 하나로 아프리카 문화를 찾을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아프리카인들 역시 미국 건설의 주역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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