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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

“나는 당신같은 외부인이 두렵습니다.”

by 방가房家 2023. 5. 31.

종교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 그것은 실제적으로는 종교를 믿는 인간과 관계를 맺는 일이며, 그리하여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을 야기하게 된다. 어떠한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지든 간에, 연구자는 그 종교인에게 타인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 설정에 관련된 논의는 종교학 방법론에서 (시원한 해답 없이) 많이 논의되는 주제인데, 로리스라는 인류학자의 한 논문이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어 여기 간추린다. (Elaine J. Lawless, "I was afraid someone like you... an outsider... would misunderstand": Negotiating Interpretive Differences between Ethnographers and Subjects, Journal of American Folklore 105 (1992): 302-314.)

로리스는 [주님의 하녀들](Handmaidens of the Lord)이라는 책의 저자이다. (사진) 이 책에는 미국 남부 오순절파 흑인교회에서 일하는 여성목회자들이 다루어 지는데, 그 중 핵심 인물이 애나 자매(Sister Anna)이다. 그녀는 주부이면서도 훌륭한 교회지도자로, 미주리 주 남부에서 성공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이끌고 있다. 그래서 저자의 책에서 그녀는 성공한 여성 종교 지도자의 사례로 다루어진다. 그리고, 저자가 자랑하듯이, 조사 과정에서 그녀와 저자는 서로를 신뢰하는 친구 사이가 된다. 선물도 주고받고, 편지로 서로 의견을 교환한다. 이 논문은, 그녀에 관련된 책의 출판을 둘러싼 편지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슈가 되었던 부분은 책의 에필로그에 나오는 애나의 가정 생활에 대한 부분이다. 책이 나올 당시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요구받고 있었다. 저자는 책에서 그녀 부부의 문제가 그녀의 사회적 성공에서 기인한 것이라 추측하였다. 역시 목회자인 남편이, 부인이 목회자로서 자신과 비교할 수도 없이 성공한 상황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이 결국 이혼 문제로 번지게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책의 이 부분에 대해서 애나는 동의할 수 없다는 답장을 보낸다. 그녀의 반론은, 그 부분에 한정된 것뿐만 아니라, 책 전반에서 제시된 그녀의 이미지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다.

나는 사람들(당신과 같은 외부인들)이 나를 모든 일을 해내는 “강한 여성”(Superwoman)으로 보려고 하는 데 두려움을 느껴왔습니다. 그러나 진정 사실은, 내가 남을 위해 일하는 것이 내 삶의 기쁨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가족이나 집안일을 도외시한 적이 없습니다. 내 아이들과 남편들도 그렇게 생각들 합니다! 나는 항상 “집에서 만든” 빵, 케이크, 쿠키 등을 요리했습니다. 집을 항상 깨끗이 청소하고, 빨래는 모두 처리했습니다. 단 한번 나는 목회 때문에 일주일 집을 비운 일이 있었는데, 이 때도 딸아이와 함께였습니다. 그것도 애들이 다 크기 전까지 그런 일 없었죠. 나는 책이 진짜 내가 살고 있는 자리를 보여주는 것이었으면 합니다. 나는 참 소심한 사람이라...


애나는 강한 여성이라는 괴물스러운 이미지에 거부 반응을 보인 것이다. 저자의 여성주의적 관점에 의해 분석되고 재구성된 자신이 현실의 자신이 아니라고 느끼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다시 편지를 보내어 애나의 오해를 풀어주려 한다. 몇 번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였으며, 자신의 저작에 반영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애나가 오해한 것도, 저자가 애나의 삶을 잘못 읽은 것도 아니다. 애나가 삶의 주체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논리와, 저자가 관찰자로서 학문적으로 구성한 애나 사이에는 필연적인 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거리를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느냐, 좁혀가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을 하느냐, 그리고 그 접근의 정도는 어느 정도냐에 따라 수많은 논쟁들이 뒤따르게 된다. (이 논쟁의 양상은 인류학과 종교학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것이 아니라 그저 감이 오는 정도라, 다음에 정리해보려 한다.)

저자의 글에는 이런 논쟁이 있으면 으레 나오는 상투적인 용어들이 등장한다. 대화, 상호 이해, 상호적인 민족지(reciprocal ethnography), 그리고 해석학적 순환. 이 용어들에서 암시되듯이, 저자의 입장은 의외로 간단하다. 서로가 이해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고, 저자가 이전의 인류학자들과는 달리 학자로서의 특권을 자신의 목소리에서 배제하였기 때문에 더욱 가치있는 민족지가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음에 차는 결론은 아니지만, 저자의 것을 뛰어넘는 뾰족한 의견을 내어 놓지 못하겠기에, 일단은 그 정도에서 수긍할 수밖에.

 



기술적인 측면에서 한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이 글의 중점은 시종일관 상호소통의 노력이다.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해 저자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책의 내용에 대해서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책이 출판사에서 최종 교정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그 상호 소통의 결과를 반영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는 점이다. 1990년대에 초반에 쓰여진 이 글을 읽고, 난 블로거로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상호소통에 있어서 역시 인터넷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그저 소통이 더 편리해졌다는 것, 예컨대 편지 대신 이메일을 주고받는 정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의 방식이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에 자신의 학술적인 글쓰기 과정을 자기 블로그에다 올리고, 애나와 같은 관찰 대상이 와서 답글을 단다면, 그야말로 상호소통의 의미에서 새로운 차원의 글쓰기가 열리는 것이다. 글이 완성된 다음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 자체에 들어와 글의 흐름에 참여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게다가 출판에 걸리는 시간으로 인한 현실과의 갭도 완전히 사라진다. 블로그는 자체로 출판된 것이며, 더구나 언제나 수정 가능한 출판물이다! 블로그의 학술적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윗글의 저자가 열나게 편지하고 변화를 반영하기 위해 출판사 편집자와 열심히 상의했던 모든 노력들은 어린애 장난에 가깝다.

한국 기독교를 대상으로 논문을 쓴다면, 위의 상호작용의 글쓰기를 구현할 수 있는 특이한 여건이 주어진다고, 난 생각한다. 어느 특정 교회를 대상으로 한 글이라면, 예외 없이 갖추어져 있는 교회 홈페이지 게시판이나 교회 카페에 글을 올려 검증받고 답글, 댓글로 토론할 수 있을 것이다. 개신교의 특정 주제를 다루는 글이라면 갓피플에 블로그를 개설하여 자신의 글을 수많은 개신교인들에게 노출시킬 수 있으리라. 전국민이 네티즌에 가까운 환경으로 인해, 연구 주체와 대상간의 상호작용에 있어서, 전에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실험이 가능해졌고, 이 실험은 심심풀이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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