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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

고전 종교학사 수업을 듣고

by 방가房家 2023. 5. 31.

강의 제목: Classical theories of Religious Studies
2003년 가을 학기, Joel Geroboff 교수


이 강의의 실라부스를 처음 접할 때 교재목록을 보고 느낀 것은 평범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접하는 생소한 학자의 글은 별로 없었다. 새로운 시각을 위해 수업 도입부에 제공된 아티클도 , 내가 직접 참가한 수업은 아니지만, 몇 해 전 정진홍 선생님의 수업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진 <<Religion in the Making>>에서 발췌된 것이었다. 처음 듣는 학자도 없고, 어느 정도는 읽거나 많이 들어본 텍스트로 짜여진 이 수업이, 처음에는 만만하게 보였다. 하지만 읽은 책이든 아니든 일주일에 한 권 정도씩 읽고 그걸 내 관점에서 정리하여 글을 쓰는 게 쉽게 진행될리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난 놀라울 정도로 많은 것을 얻었다.

고전을 차분하게 소화해 나간다는 것. (사실 차분하다는 말엔 어폐가 있다. 일주일에 한권도 날림이라는 느낌이 다분하다.) 돌이켜보니 종교학을 공부한 지 꽤 되었는데도 그런 경험은, 특히 강의 상에서는, 전무했던 것 같다. 나는 종교학에 대해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전들 여기 저기 있는 보물같은 구절들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런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은 무엇보다도 게러보프 교수가 핵심을 꿰면서 수업을 진행해 나갔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고전을 읽으면 그 안의 풍성한 내용으로 인하여 토론이 중구난방이 되기가 십상이다. 학생들의 이런저런 얘기들을 교수는 용케도 잘 꿰어나갔다. 때론 학생의 발언을 이용하고, 때론 날카로운 반문을 던지고, 때론 문제를 제기하면서 논의를 핵심으로 이끌어가는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또 하나 놀랐던 것은 굉장한 피드백이었다. 교수는 평소에, 수업 없는 날에 질문이 생기는 대로 이메일을 보내줄 것을 주문하였다. 전체 메일 형식으로 모두가 볼 수 있게 말이다. 말이 안 되는 나로서는, 메일로 내 의견을 표출하는 게 좋은 기회라고 내심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메일을 활용한 것은 몇 번 안 되었다. 오히려 미국 애들 메일에 기가 질려 버렸다. 나는 전날까지 책 못 읽어서 생난리를 치는데, 딴 애들은 며칠 전부터 메일을 뭣같이 쏘아대고 매주 열통 스무통 쌓이는 메일을 읽어보지도 못하고 버린 게 몇 개던가. 교수는 메일 답장하는 걸 무지하게 즐겼다. 어김없이 즐겁게 학생들에게 답장을 보냈다. 게다가, 매 시간 제출하는 페이퍼에 대한 코멘트는 감동적일 정도였다. 다음 시간에 페이퍼가 시커매질 정도로 코멘트를 달아서 주는 데, 그 내용이 내 요지를 완벽하게 파악하면서 발전시킬 수 있는 부분을 말해주는 것이라 그 정확함과 풍성함에 많이 놀랐다. 학생의 기를 좋을 쪽으로 살려주는 교수의 태도는 배울 게 많았다.
나는 이 실라부스가 정말 잘 짜여졌다고 생각한다. 아마 다년간의 강의가 있었을 것이다. 분량에서나 다루는 주제에서나 참 적당하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나를 흥분시키는 것은 이 수업의 형식은 “당장” 한국에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십 년 사이에 우리는 여기서 다루어지는 종교학 고전 이론들의 번역을 대부분 지니게 되었다. 슐라이에르마허, 프레이져, 뭘러, 프로이트, 융, 뒤르켐, 칼 맑스, 윌리엄 제임스, 에반스 프리차드, 루돌프 오토, 엘리아데, 다 번역되지 않았는가. 베버의 종교사회학 정도가 번역되지 않았을 뿐이다.

한국의 대학원 수업에서, 원서를 얼마나 읽냐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정해진 책을 심도있게 읽어나가는 수업이면 두세권을, 많은 이론과 정보를 제공하는 수업은 여섯 일곱권 이상은 읽어제낀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자의 수업을 선호하지만, 대부분의 수업은 후자에 속한다. 문제는 한국 대학원 수업에서 읽는 책이 다섯권이 넘어가면 자기 맡은 부분만 읽고 나머지는 입심으로 때우는 지적 사기가 수업을 지배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는 것이다. 실라부스 상으로는 미국 수업과 거의 흡사하겠지만, 이래서는 다량의 정보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 황폐함만 남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같이 일주일에 한두권씩 읽는다고 해도, 미국애들과 한국애들이 텍스트에 대해 갖는 태도는 하늘과 땅 차이다. 여기 애들 책 정말 시시껄렁하게 읽는다. 고도의 독해를 하는 애들도 있지만, 보통은 소설책 읽듯이 휙 읽어버리고 인상적인 몇 대목을 갖고 이해하려 든다. 물론 그걸 배우자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여기 애들은 텍스트에 “주눅”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업 초기에 내가 많이 느꼈던 것은 내가 그동안 텍스트에 얼마나 주눅이 들어 살아왔던 가였다. 나에게 텍스트는 신성한 것이었다. 일단 저자가 무엇을 말하는가는 그의 논리를 따라 순차적으로 하나하나 이해해야 했고, 번역의 문제가 적잖이 나를 짓눌렀다. 나는 발제라는 형식을 통해 저자의 논리를 한글로 복제하는 연습을 무수히 했다. 그런데 여기 애들의 웃기지도 않는 발제문, 책 한 권을 놓고 그저 인상적인 대목 찍찍 서너 개 적어놓고 이런 저런 얘기를 늘어놓는 발표가 적잖이 충격이었다. (한국의 세미나에서 후배가 그런 발제를 해왔다면 난 아마 졸라 뭐라고 했을 거다.) 뭐 읽었으니까 내용은 다 아는 거 아니냐는 태도다. 그러니 난 얘기하고 싶은 것만 한다는... 난 텍스트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사랑하고, 미국 애들의 피상적인 독서는 극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러운 것은 텍스트에 대한 자유로운 위치 설정이다. 내용이 뭐든 간에 꼬부랑 글씨만 보면 주눅이 드는 게 내 콤플렉스이다. 그런 걸 극복하는 훈련이 참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난 한글 책 퍽퍽 읽어제끼는 대학원 수업도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대학원생이면 일주일에 한 권 정도는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실현할 수 있는 수업이며 좋겠다. 영어가 아니라 저자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하고, 독해가 아니라 독서를 논하는 수업말이다. 난 종교학 고전 이론에 대한 수업이 “예외적일 정도로” 그게 가능한 수업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 종교학 고전 책들 좀 많이 읽어놔야 한다. 그걸 제도적으로 갖추어놀 필요가 있다. 대학원이 종교학 학부출신 중심에서 벗어난 지가 언제인데, 언제까지 자기완결적인 코스웍을 갖추지 못해 이론의 결핍에서 학생들을 헤메이게 할 것인가. 머리만 잘 굴리면 좋은 실라부스 짤 수 있는데, 하얀 바덴버그 영어 편집본 억지로 뒤적이며 강의 하나 날리는 건, 지금 생각해도 너무 시간이 아깝다. 한국의 학문이, 괜찮은 종교학 이론 수업 하나 무리없이 돌릴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 있다는 것을, 나는 여기 와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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