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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기독교세계

산상수훈, 마태의 이야기와 누가의 이야기

by 방가房家 2023. 5. 27.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예수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각각 실려 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의 내용과 분량이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산상수훈은 주로 마태복음에실려 있는 내용이다. 다음과 같다. (표준새번역개정판, 마태복음 5:1-12)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예수께서 입을 열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그 다음은 누가복음에 실려 있는 내용을 보자. (표준새번역개정판, 누가복음 6:17-26)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 거기에 그의 제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고, 또 온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 및 시돈 해안 지방에서 모여든 많은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의 이름을 악하다고 내칠 때에는,너희는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예수 가르침의 두 개 버전의 차이는 심대하다. 몇 가지를 지적해 본다.

1. 배경상의 차이. 마태의 것은 산 위에서 가르친다. 산상수훈(Sermon on the Mount)이다. 반면에 누가의 것은 산상이 아니다. 평지에서 가르치는, 평지수훈(Sermon on the Plain)이다. 마태에서는 산이 강조된다. 마태는 예수를 모세 율법의 계승자로 보기에, 시내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십계를 받은 모세처럼, 예수를 산에 올리는 일이 잦다.

2. 분량의 차이. 마태는 9개의 지복(beatitudes)을 말하는 반면에 누가는 단 4개의 지복을 말한다. 마태가 107절의 긴 분량을 할애하는데 반해, 누가는 30절을 할애하고 있다.

3. 복받는 대상의 차이. 이 차이는 매우 교묘하다. 하지만 신학적 관점의 차이를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누가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 그런데 마태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마음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음으로써, 마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현실의 물질적인 조건에 대한 이야기가 내적인 측면의 이야기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누가의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배고픔의 급박함을 말하는 대목인데, 마태는 이것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
누가에 나타난 가르침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전복하는 혁명의 메시지이다. 그래서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네 개의 지복을 말 한 후 지금 부자이고 배부른 사람들이 나중에 고통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태에서는 이 역시 다음 문장이 첨가됨으로써 매우 부드러운 이야기가 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4. 그밖에도 많은 차이들이 있을 것이다. 예컨대 (잘 설명은 못하겠지만) 하늘 나라와 하느님의 나라의 개념 차이와 같은... 논의될 필요가 있는 중요한 신학 개념들이 많다. (예컨대, http://my.dreamwiz.com/tulip7/KRTS/krts2-1.htm )

마태와 누가의 차이는 같은 자료를 사용해서 얼마나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누가 버전은 과격한 혁명의 가르침이다. 예수가 사회주의자라는 이야기를 괜히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배고프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가르침이다. 아마도 이런 구절을 놓고 강남 교회에서 설교를 한다면 분위기 무지하게 싸해 질 것이다. 그런데 마태 버전은 단어의 절묘한 삽입과 재배치를 통해, 혁명의 선도를 도덕적 가르침으로 탈바꿈했다. 과장해서 말하면, 공산주의 선언을 민중의 아편으로 전환하는 연금술을 선보였다고나 할까. 현실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고통을 참고 견디면 나중에 하느님이 보상해 줄 것이라고 하는, 현실 체제 유지의 종교(religion of the status quo)의 모습이다. 강남 개신교인들이 안심하고 경청할 수 있는, 아름다운 도덕이고 고도의 추상화이고 세련된 교훈이다.
과연 누구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말씀일까? 실제 예수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학문의 규명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전승에 전승을 거친 매우 불완전한 자료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누가의 것이 원래의 전승의 형태를 더 간직하고 있다는 게, 두 복음서를 비교연구한 학자들의 대체적인 결론이다. [나는 산상수훈에 대한 내용을, 버튼 맥, [잃어버린 복음서]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접했다. 지금 갖고 있지 않아 다시 확인해보진 못했지만, 매우 탁월한 분석이었다고 기억한다.]
어릴 적부터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를 많이 생각해보곤 하였다. 마음을 비우고 산다는 의미인지, 왠지 심오한 말인데 잘 뜻이 잡히지 않았다. 지금 와서 나는 누가의 버전으로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리고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레토릭의 변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고민에서 벗어나 있다. 내 나름의 편한 결론이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산상수훈이 한국 사람들에게 유통되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 즉 개역판 성경의 해석을 감상해보자. 안 그래도 유려하고 심오한 마태의 본문이 옛 한글투로 인해 신비스러운 느낌마저 주는 본문이다. 다음이 한국의 대부분 개신교인들의 가슴속에 간직된 산상수훈이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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