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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미리 석불입상

by 방가房家 2023.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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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703번을 타면 벽제, 고양을 지나 ‘용암사입구’ 정류장에 갈 수 있다. 용암사 대웅전 뒤에는 거대한 한 쌍의 석불을 만날 수 있다. 용미리 석불입상이다. 고려시대의 지방 양식이 완연한 이 분들을 서울 근교에서 비교적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것이 반갑다. (다른 사진들을 보려면 오마이뉴스 기사를 참조할 것.)
‘미륵불’이라고 주로 불리는 이 석불에 대해서는 고려 시대의 조성 설화가 전한다.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선종(宣宗, 재위 1084∼1094)은 뒤를 이을 후사가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후궁인 원신공주(元信公主)의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나 말하기를 “우리는 파주 장지산에 산다. 식량이 떨어져 곤란하니 그곳에 있는 두 바위에 불상을 새겨라. 그러면 소원을 들어주리라” 하였다. 원신공주는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알아보았더니 그곳에 실제로 커다란 바위 두 개가 서 있었으므로 서둘러 불상을 만들게 했다. 그때 꿈에 보였던 두 도승이 다시 공사장에 나타나 왼쪽바위는 미륵불로, 또 오른쪽 바위에는 미륵보살상을 조성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모든 중생이 와서 공양하며 기도하면, 아이를 바라는 사람은 득남을 하고 병이 있는 사람은 쾌차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뒤 문득 사라졌다. 그 뒤 불상이 완성되고 그 아래에 절을 짓고 나니 곧이어 원신공주에 태기가 생기고 사내아이를 출산하게 되니, 그가 곧 한산후 물(漢山侯勿)이라고 한다. 한산후는 실재 선종과 원신궁주의 아들로서 선종의 뒤를 이온 현종의 동생이기도 하다. 따라서 위의 전설에 나오듯이 선종이 후사가 없어 고민했다는 말은 사실과는 다르다. 또 한산후는 태자가 아닌 서자로서 이름도 물이 아래라 윤(?)이며, 그의 어머니도 공주가 아닌 궁주(宮主)이다.

위의 기원 설화에서 이 미륵들이 아들을 바라는 기자(祈子) 신앙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암시를 받을 수 있다.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이곳을 찾는 불자 중에서는 아들을 바라는 기도를 드리는 아낙들이 많이 있지 않을까, 아들에 대한 ‘영험함’이 입소문을 타고 전승되어 기자신앙의 중심지로 형성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예상을 하게 된다.
 
이것은 서울 인왕산의 기자신앙 성지(聖地)인 선바위의 예(인왕산 선바위 )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선바위를 떠올리게 된 것은 선바위에서 보았던 “무속금지”라는 팻말을 여기서도 보았기 때문이다. 이 팻말의 존재는 이곳이 굿이 행해지는, 무속 신앙의 중심지이기도 함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분명 그 굿은 기자와 관련된 것이리라.

동일한 ‘무속금지’ 팻말이지만, 선바위와 용암사 쌍미륵은 무속과 불교 신앙의 관계에 있어서 반대의 양상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선바위의 경우 무속 신앙의 중심지를 불교가 점령하고 인수하려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쌍미륵의 경우 불교에 의해 조성된 성스러운 공간을 무속이 이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말이다. 물론 쌍미륵이 조성된 이곳이 원래 무속의 성스러운 장소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조사하면 알 수 있는 것들도 많겠지만, 워낙 스쳐가며 본 것이라 이 정도 생각에 머물게 된다.
덧붙임. 가건물로 지은 임시 산신각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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