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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돌아다니다가

못생긴 부처님을 찾아서

by 방가房家 2023. 5. 23.

불현듯 생각이 나서 옛 글을 뒤져보았다. 안성 지방 답사를 준비하면서 옛날(학부 시절이니까 7-8년은 되었겠다)에 쓴 글이다. "못생긴 부처님을 찾아서"라... 제목은 그럴듯 하다. 모난 돌처럼 튀는 표현들, 소화되지 않은 용어와 인용문들, 그리고 내 글의 특징인 터무니 없이 과감한 가설...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겠으나 눈을 질끈 감고 올려버린다. 어쨌거나 나는 이 글을 준비하면서 “종교와 아름다움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질문을 던져 보았고, 아직도 가끔 그 질문을 떠올려보곤 한다. 나에게 너무 벅찬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질문임에는 틀림없다.
답사 자료집의 서문격의 글이라 구체적인 내용은 빠져 있다. 짧막하게 이야기하자면, 안성 지방은 이상하게도 미륵불이 많이 모여있는 지역이다. “이상하게도”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에 대한 뚜렷한 이유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궁예미륵, 쌍미륵, 태평미륵, 대농리미륵, 아양동미륵 등이 안성땅에 사는 미륵들이다. 마을 신앙의 품으로 들어온, 투박한 돌미륵들을 돌아보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재미이다. 남사당의 흔적이 어린 칠장사도 좋고, 프랑스 신부가 포도를 들여와 한국에서 처음 심은 땅이기에, 넓게 펼쳐진 포도밭은 보는 맛도 시원하다. 다양한 종교문화의 향기를 느끼게 되는 곳으로, 수도권에 사는 분들에겐 하루짜리 답사코스로 권할만한 곳이다.


1. 들어가는 글

이번에 우리가 뵐 미륵불들은 그리 잘나지 않은 분들이다. ‘불상’하면 떠오르는 위엄하고는 전혀 거리가 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나 석굴암에 앉아 계신 본존불처럼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조각이 아니다. 그렇다고 유구한 역사의 후광을 업고 있는, 잘 알려진 유물도 아니다. 이 미륵불들은 절에서 모셔지는 부처가 아니라 길가에 서있는 부처님들이다. 비바람을 그대로 맞으면서도 길가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는 부처님이다. 농사짓던 이들이 그의 그늘 아래서 새참을 먹을 때, 미륵불은 또한 미소지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아낙들은 일이 있을 때마다 미륵에게 와서 자신의 사정을 풀어놓는다. 우리가 찾아가는 미륵은 민중들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와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다정한 얼굴을 한 그런 부처님이다.
나는 앞서 너무 쉽게 ‘못생긴’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조금만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성찰해 본다면 그러한 식의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못생김’이라는 말이 그렇게 간단히 내뱉어질 수 있는 말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일상 언어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고전적 미의 관념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아직도 비례와 대칭이라는 짜임새, 실물과 꼭 닮게하는 묘사력, 잡티없는 깨끗함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 한다. 이러한 관점은 사람의 얼굴을 판단할 때 극명히 드러난다. 그런데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만해도 미의 기준은 그렇지 않다. 현대 예술은 우리의 미의 관념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을 추구한다. 대부분의 우리는 촌스럽게도 고전회화의 잘 다듬어진 아름다움만을 볼 줄 알지 현대회화의 난해한 추상성, 파격성에 대해서는 안목을 갖고 있질 못하다. 분명한 것은 현대의 아름다움의 개념은 변화하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고여 있는 관념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움보다 훨씬 자유로운 경지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다. 고전적인 미의 관념은 특정한 정형, 양식을 요구한다. 세속적인 미인 대회에서도 요구되는 것은 ‘판에 박은’ 얼굴들이다. 우리가 미륵을 만날 때는 고전적인 미의 개념이 제공하는 모델, 이상형(ideal type)을 깨뜨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부처님은 이러이러하게 생겨야 한다’는 생각을 지워내고 미륵불과 대면해야 한다는 말이다. 아름다움의 개념에 있어서의 촌티를 벗도록 하자. 답사날에는 레이스 달린 속옷은 입지 말지어다.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하기로 하자. 이 자리는 아름다움에 대해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 성스러움에 대하여 논하는 자리이다.


2. 미륵신앙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
 

나는 우리가 찾아가는 미륵들이 못생기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학문적 서술-사학계나 미술사적 입장-에서 이들 고려후기, 조선시대의 미륵불들은 엄연히 ‘못생긴 부처님’으로 진술되고 있다. [미륵불]이라는 책에서 조선 시대를 다룬 한 대목을 인용해 보도록 하겠다.

조선조의 억불정책 아래 미륵불 조상에 있어서는 고려시대와 같이 큰 미륵불 조성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이 조사에서 밝혀졌으며, 대체로 작은 미륵불이 나타나고 조각 수법도 매우 조잡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 . 또한 미륵 신앙은 더욱 민중층과 접촉되어 주술적 성격을 띠면서 민간신앙으로 전개되어 불상으로서의 조형미를 갖추지 않은 입석이나 바위조차도 미륵으로 인식하고 종교 행위를 하게 된다.


백과사전의 미륵신앙의 항목을 찾아보면 조선시대의 미륵신앙은 삼국, 고려시대보다 훨씬 간략하게 서술되고 있으며 그 내용이나 어조는 위의 인용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서술들의 내용은 미술사적으로는 ‘조형 양식의 쇠퇴’, 종교사적으로는 ‘불교의 민간신앙화’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민간신앙화’라는 어휘에는 부정적인 함의가 담겨있다. 민간화된 종교는 기복적이고 주술적인 요소를 받아들인 일종의 변질이라는 혐의를 받는다. 고매한 종교적 이상이 민간적인 신앙속에 편입될 때는 필연적으로 교리의 단순화와 변질을 겪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사상사적인 입장에서 보면 마을에 있는 미륵들은 미륵 사상에 대한 민중들의 소박한 이해라고 평가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 전체의 입장에서의 평가는 사뭇 달라질 수 있다. 교리만이 종교는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는 교리, 제의, 신앙 집단, 다시 말해 사상적 측면, 행위적 측면, 공동체적 측면으로 서술될 수 있으며 어느 한 측면의 약화로 전체 종교를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종교사를 살펴보면 교리적인 측면이 너무 비대화되어 종교로서의 생명력을 잃는 경우도 많이 찾을 수 있다. 종교의 세 측면을 다 고려해 본다면 조선의 미륵불교는 교리의 측면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나머지 측면에서는 이 땅의 종교로서 완전히 뿌리박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민중의 심성에서 이 미륵들이 어떠한 종교 현상으로서 존재하였는지를 이 답사에서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답사 준비과정에서 조선시대의 미륵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종교학적인 조명이 필요함을 절감하게 되었다.

 

3. 종교학적 관심에서 바라본 ‘못생김’
그렇다면 이 부처님들의 ‘못생김’을 종교학적인 입장에서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이 고민에 관해 판 데르 레이우의 [종교와 예술]의 한 대목이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가끔 진정으로 아름다운 순수예술작품보다 민속작품이 예배의 대상으로 더 적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어느 예수회 수도원의 예배당에서 매우 보기 흉하게 생기고 통속적인 ‘피에타(Pieta)'상을 보았다. 나를 안내하던 신부가 전에는 순수예술품을 놓았었는데 그것을 치웠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기도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이 시사하듯이 신앙은 아름다운 것보다는 흉한 것을 오히려 좋아한다. 왜냐하면 예술가 개인의 안목보다는 통속적인 관념이 성스러운 것을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훨씬 더 명확하게 구별하기 때문이다.

판 데르 레이우는 이 글에서 예술작품의 형상성과 성스러움의 갈등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예술 작품을 통하여 성스러움을 표현한다는 것은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적인 묘사는 성스러움을 탈색할 위험성을 지닌다. 누가 궁극적인 실재인 부처님을 묘사할 수 있겠는가. 잘 묘사된, 그러니까 잘 생긴 부처님은 잘생긴 누군가를 모델로 하여 작성될 수 밖에 없다. 석굴암 본존불에서 신라사람들의 이상적인 미인의 모습을 우리는 유추해볼 수 있다. 우리는 잘생긴 부처님 앞에서 성스러움보다는 인간성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판 데르 레이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묘사는 항상 두 개의 위험 사이에서 움직인다. 즉 표현된 이미지의 완전함과 이미지의 사라짐이 바로 그것이다. 종교는 앞의 위험을 우상숭배라고 부르고, 예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모토 아래 뒤의 위험을 반대한다.

종교사에 있어서 우상타파의 움직임은 여러번 일어났다. 십계명의 우상숭배금지, 동서로마 분리 당시의 성상숭배 금지령, 이슬람교의 형사 제작 금지 등이 유명한 사례들이다. 붓다도 자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였다. 그러나 성스러움을 표현하려는 열망은 지속되어 불상이 제작되었고 이것이 위에서 인용한 두 위험-표현된 이미지의 완전함과 이미지의 사라짐- 사이의 긴장을 동반하였다. 이러한 긴장 관계 위에서 우리나라의 불교미술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통일신라 시대는 우리나라의 불교사에 있어서 정점을 이루었던 시기로 말해진다. 그리고 고려조를 거치며 양식의 지방화가 진행되고 조선조에는 억불정책 아래 조형예술이 쇠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표현이 사실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쇠퇴라고 규정할수 있는 것일까. 그 과정은 종교적으로 바라볼 때 성스러움의 드러남이 더욱 풍성해 졌다고 말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신라 석공보다 고려, 조선시대 석공들의 기술이 떨어져서 가분수의 부처님, 길쭉한 부처님 등등의 여러 부처님들이 나오게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박하게 말해 사람들은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부담이 느껴지는 부처님보다는 정감이 느껴지는 간략한 형상의 부처님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나는 소위 말하는 ‘쇠퇴의 과정’을 ‘추상성의 발달’, ‘상징성의 고도화’라고 규정하고 싶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불교미술사의 변천을 앞서 말한 여러 우상파괴의 흐름과 같은 흐름으로 놓고 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기독교의 우상타파는 파괴를 불러일으켰으며 이슬람의 우상숭배 금지는 고도로 추상화되고 기하학적인 아라베스크 무늬를 발전시켰다. 우리나라에서는 훨씬 완곡한 움직임이지만 형상의 금지의 흐름이 마치 현대예술을 연상시키는 추상성과 상징성을 발달시키게 되었다.

4. 맥락의 교차위에서
우리는 답사를 떠날 때마다 종교 현상이 교리로만 설명될 수 없는 것임을 절감하게 된다. 종교의 세 측면에 대해 수도 없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종교에 대한 이해는 교리의 껍질에 둘러싸이게 되고 답사 때마다 이 껍질에서 벗어남을 느끼는 것이다. 이번에 찾게 될 미륵들도 미륵 불교의 교리에 의해서만 설명되기에는 많은 어려움을 갖는다. 미륵은 한가지 관점의 조망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의 맥락 위에 놓여있다. 이에 답사를 준비하는 이들은 미륵이 위치한 여러 맥락들을 찾아내고자 노력하였고 불교 교리 외에도 크게 두 가지 맥락을 제시하였다. 한가지 맥락은 역사적인 탐구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으며 ‘민중’이라는 개념에 힘입은바 크다. 또 하나의 맥락은 민속학적 탐구의 결실로 ‘마을’이라는 개념에 의지한다. 그 두 맥락을 나는 엘리아데의 용어를 빌려 ‘역사적 미륵’과 ‘우주적 미륵’이라고 불러보았다.

ㄱ.역사적 미륵
엘리아데는 기독교의 종말론적 세계관에 주목하여 역사적 종교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유대민족의 신은 동방의 신, 혹은 원형적인 행위의 창조자가 아니라 이제는 끊임없이 역사에 끼어드는 인격, 여러 사건들(침략, 점령, 전투 등)을 통하여 그의 뜻을 나타내는 인격인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사실은 신과의 관계 속에 있는 인간의 ‘상황’이 되고, 그 역사적인 사실은 그것 자체로 이전에는 그 어떤 것도 그 사실에 대하여 부여하지 못했던 종교적인 가치를 스스로 지니게 된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역사의 의미를 신의 출현으로 터득한 최초의 사람들은 히브리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엘리아데의 논의에 미륵을 포함시킬수 있을까. 사실 엘리아데의 ‘역사’ 개념은 기독교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논의의 손상과 개념의 출혈이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아데의 ‘우주와 역사’라는 틀이 우리에게 유효한 설명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의 미륵이 논의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미륵은 ‘시간 안에서’ 역사에 끊임없이 개입해왔다. 우리가 찾아가는 궁예 미륵에는 이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미륵의 개념은 더욱 적극적으로 역사에 참여한다.

95년도의 종교학과 답사때 우리는 운주사의 미륵들을 둘러보았다. 그 미륵들에 대한 이야기는 분분하였지만 우리를 사로잡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운주사 와불이 일어날 때...’ 세상은 변한다는 민중의 염원이 담긴 전설이었다. 미륵불은 조선 후기의 수탈당하는 민중들의 사회 개혁의지의 표상이었다. 민중들은 구원자로서의 미륵을 기다렸으며 동시에 미륵은 민중들이 자신의 이상향을 구현하는 힘이 되어주었다. 더욱 주목해야할 것은 미륵에 대한 열망이 아직까지도 유효한 것이라는 것이다. 운주사에 가기 전날 우리는 광주 망월동 묘역(이제 곧 국립묘지가 되겠지만)을 참배하였다. 때마침 그곳에서는 광주 비엔날레에 반대하는 안티-비엔날레가 진행 중이었고 길가에 도열한 민중화(民衆畵) 속에서 우리는 운주사의 미륵들이 그려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운주사 와불을 일으키고자 했던 민중의 염원은 오늘날의 광주 시민들의, 한국 민중들의 염원으로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용화세계가 열리지 않는 한 미륵불은 민중들과 함께 이 땅을 지킬 것이다.

ㄴ. 우주적 미륵
그러나 이 역사적 미륵은 우리나라에서 변신을 시도한다. 역사적 종교에서 우주적 종교로의 변모가 시도된다. 마을이라는 우주안에 들어옴으로써 미륵은 ‘우주적 미륵’이 된다. 미륵은 중생구제(衆生救濟)의 거창한 이상을 접어둔채 마을 어귀에 서있게된다. 장승, 솟대, 선돌, 당수나무 등과 같이 미륵은 마을사람들의 친근한 신앙의 대상이 된다. 미륵은 벙거지나 관모를 쓰기도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기도 한다. 마을사람들에게 미륵은 ‘부처님’이 아니라 ‘미륵님’일 따름이고 동제로써 모셔진다. 동제, 즉 마을의 일년이 열리는 순간에 미륵은 태초의 시간, 우주 창생의 순간에 놓이고 모든 재생을 가능케하는 근원이 된다.

아양동의 할아버지, 할머니 미륵은 이 우주적 미륵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들 미륵은 앞서 이야기한 역사적 미륵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이들은 어지러운 역사의 현장에 직접 개입하여 민중을 구제하지는 않는다. 대신 지친 민중의 심성을 우주적인 리듬속에 조화시킴으로써 보듬어준다. 예를 들어 흉작과 같은 고난은 미륵을 제대로 모시지 않음으로써 일어난 일이고 , 미륵을 잘 모심으로써 마을의 안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5. 답사의 힘
답사는 다른 세계를 열어젖히는 힘을 길러준다. 보통 사람들이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돌덩이에서 우리는 우주를 읽어낸다. 사실 우리나라의 답사는 화려한 스펙터클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석굴암, 다보탑, 석가탑 등의 유물들을 수학여행에서 처음으로 대했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솔직히 실망 그 자체였다. 그것은 접근 방식이 틀려먹었기 때문이다. 이 땅의 답사 대상들은 커다란 규모나 화려한 외양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을 압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물들이 수학여행의 혼란한 와중에서 자신을 드러낼 여지는 없다. 그러나 구도자의 걸음걸이로 이들에게 다가가 합장을 올릴때 우리 앞에는 무한한 우주가 열린다. 종교는 상징의 원리에 의해 드러난다는 엘리아데의 이야기를 우리는 들은바 있다. 상징은 해석되어질때만이 의미를 지닌다.
답사를 지탱하는 가장 커다란 힘은 상상력이다. 답사자는 상상력을 통하여 유물이 놓여있는 맥락안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다. 미륵을 만드는 장인의 모습을 상상하자. 미륵에게 아들을 간절히 비는 아낙의 모습을 상상하자. 동제를 지낼 때의 미륵앞에 차려진 제상을 상상하자. 그리고 자연과 벗삼아 홀로 서있는 미륵의 모습을 상상하자. 그러한 상상 속에 푹 빠지면서 미륵을 대면할 때 우리는 미륵의 미소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거기서 성스러움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옛날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백제의 탑에서 돌의 온기를 느낀다는 어느 학자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러한 자세야말로 답사를 답사답게 해주는 힘이요, 우리가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상징은 읽혀질 때만이 스스로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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