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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출판물

책꽂이 한 칸

by 방가房家 2023. 5. 22.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시절 나의 꿈은 꼭 필요한 내용의 글만 적게 쓰는 학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도서관을 전전하다가 제목만 그럴듯하고 내용은 이런저런 논문을 엮어 만든, 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책들에 물렸던 터였다. 보석 같은 책 몇 권만 남긴 학자가 그렇게 멋져 보였다. 그래서 나는 불필요한 책으로 종이 낭비를 하는 학자가 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2021년 나의 현실은 이와 정반대였다. 재작년부터 나는 학술적 글을 생산하는 공장 안에 들어와 있다.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지금 우리 학계는 논문의 생산을 강요하는 체제이다. 학자는 논문의 생산량으로 평가받는다. 나 역시 연간 논문 편수를 계약 조건으로 하는 연구직에 있다 보니, 내 학문적 관심은 오직 적당한 크기로 잘라 논문을 만들 재료를 찾는 일이 거의 전부이다. 내가 설정한 학문적 기준이 아니라 ‘논문심사를 통과할 정도’가 학문적 기준이 되어가고 있다.
논문과 써야 할 글을 이것저것 쓰다 보니 그 부산물로 내 이름이 포함된 책들이 왕창 나왔다. 작년에 여러 권의 공저가 나오는 바람에 내 책(?)이 책꽂이 한 칸을 꽉 채웠다. 나는 이미 종이 공해의 공범이 되어 있다. 국가 정책은 한글 논문의 양을, 한글 컨텐츠의 양을 늘리는 데 중점이 맞춰진 듯하며, 어느 정도는 그 결과에 만족하는 것 같다. 학자들은 글의 값이 떨어지는 것에 신음하고 있지만 정책은 이 방향으로 계속될 것이고, 나 역시 여기에 적응해가고 있다. 올해도 종교학 관련된 글의 양을 늘리는 것을 나의 소임으로 삼을 터이다.
이상은 이 블로그가 일 년 동안 방치된 것의 간접적인 이유이다. 인쇄되는 공식적인 글을 쓰느라 방전된 상태의 연속이었다. 물론 블로그와 논문은 장르가 다르기에 그 둘이 공존한다는 게 내 기본적인 생각이지만, 이상하게도 작년에는 그럴 힘이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핑계 대지 말고 보람 있게, 그 보람의 흔적이 여기 남도록 지내리라 희미하게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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