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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잡기

방씨에 대한 새로운 이론: <정감록>에 등장하는 방씨

by 방가房家 2023. 5. 22.

조선후기 정감록 신앙에 대해 읽다가 ‘방씨’ 언급에 필이 꽂혀 써버린 글. 이걸 그대로 수업시간 독서에 대한 논평 과제로 제출해 버렸는데, 뒷탈은 없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성씨에 대해 불타오르게 된 것은 어제 우연한 계기에 다시 읽은 "가"씨에 대한 딴지일보의 초기 명작인 "한국을 지킨 사람들-정보통신편"을 다시 읽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성씨에 대한 이미지의 역사가 연구된 적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있으면 큰 도움이 될 터인데...


나는 지금껏 한국사에서 남양(南陽) 방씨(房氏)의 존재는 미미했다고만 생각했다. 현대 한국사회에서는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투수 방수원과 만화가 방학기(房學基)를 통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지금 방씨에 대한 나의 생각으로는 “房家의 房氏 이야기”를 참조할 것), 고려와 조선조의 역사에서는 그나마 그만한 존재감도 없었던 성씨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조선 때 6명의 문과급제자와 2명의 의병장이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의 개국 공신 방계홍(房季弘)이 있는 정도이다.) 그런데 정감록에 포함된 비결(秘訣)에서 발견되는 방씨에 대한 언급은 나의 선입견을 깨는 것이다. 이 기록은 조선시대에 방씨에 대한 모종의 사회적 이미지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가정마저 가능케 한다.

<<정감록>>의 저자로 상정된 정감은 정씨 가공인물이다. 백승종의 지적대로(<<한국의 예언 문화사>>, 89), 조선 건국에 반대한 정몽주, 왕자의 난에 희생된 정도전, 16세기 반역에 휘말린 정여립, 18세기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던 정희량 등의 인물들을 통해서, 정(鄭)씨는 조선조에 대한 반역의 이미지를 가진 성씨로 인식되어 왔고, 그것이 정감(鄭鑑)이라는 가상 인물의 성을 붙이게 된 민중적 논리였다. 이 비결들에 등장하는 성씨들은 우연히 등장한 것들이 아니다. 정씨만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성씨의 선택에는 민중적 이미지와 상상력이 반영되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다음 대목이다. 정씨 성을 가진 이가 반란을 일으키고 나라를 세울 때 힘을 합치는 사람들에 대한 예언이다.

계룡산에 나라를 세우면 변씨(卞氏) 성을 가진 정승과 배씨(裵氏) 성을 가진 장수가 개국(開國)의 일등공신이 될 것이고, 방성(房姓)과 우가(牛哥)가 손과 발처럼 도울 것이다. <감결>


변, 배, 방, 우 네 성이 새 나라의 주역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여기서 방씨 성을 가진 이는 참모나 내정을 맡는 역할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실망스럽게도) 다른 자료에서 방(房)씨는 방(方)씨로 변하여 나오고 있다. 여기서는 반란을 일으키는 과정에 집중하여 언급하는데, 돕는 성이 방과 두, 둘만 언급되어 있다.
장류수 운에는 푸른 옷을 입은 자들과 흰 옷 입은 사람들이 서쪽과 남쪽에서 한꺼번에 침략하리라. 이때 전읍(奠邑)이 해도(海島)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방씨(方氏)와 두씨(杜氏) 장수와 함께 갑오년 섣달에 즉시 금강을 건넌다면, 천운이 돌아와 태평하리라. <토정가장결>

<<정감록>>에 포함된 여러 비결들 간의 상호관계를 확실히 이야기할 수는 없다. 어느 전승이 어느 전승을 참조하였는지, 또 (마치 Q자료와 같은) 공통된 다른 전승을 참조하였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정감록>> 맨 앞에 실려 있는 <감결>이 사실상 <<정감록>> 자체, 즉 본문이며 <토정가장결>을 포함한 다른 비결들은 부록에 해당하는 전승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백승종, <<한국의 예언문화사>>, 229-260) <감결>의 방(房)과 <토정가장결>의 방(方)을 놓고도 <감결>의 우선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방(房)은 희귀하고 특이한 성이고 방(方)은 흔하고 일반적인 성이다. <감결>의 방(房)이라는 희귀한 성이 전승과정에서 “방? 방씨면 방(方)이지”라는 식으로, 즉 주변에서 아는 방씨라면 방(方)이라고 이해하는 변화가, 구전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변화는 생각하기 힘들다. 독특성을 지닌 자료가 원래 자료일 가능성이 크다는 추론이다.
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두 자료 모두에 등장하는 성씨는 (비록 다른 한문이긴 하지만) 방씨가 유일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방씨라는 음가가 주는 이미지가 당대 사람들에게 정도령의 신화적 조력자로서 어울린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정씨를 도와서 조선 왕조를 전복하고 새 나라를 이룩하는 아웃사이더 세력으로 방(房)씨가 언급되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비결의 전승 주체 중에 실제 방씨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현재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정도인 것 같다. 방(房)씨는 조선 역사에서 비(非)존재가 아니었다. 방(房)씨는 조선 민중의 상상력 속에 존재하였으며, 그 이미지는 주류 쪽이 아니라 아웃사이더의 이미지에 더 부합하는 성이었다는 것. 이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방가(房哥)들을 이해하는데 소중한 성과라 하겠다.

 

*자료 보충: 정감록 비결에 등장하는 방씨의 원형은 정여립 사건 때 처형된 방의신(方義臣)일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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