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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잡기

인식론과 행위

by 방가房家 2023. 5. 22.

어제 봄비가 왔다. 오랜만에 들은 배따라기의 노래.

男: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女: 나는요 비가 오면 추억 속에 잠겨요

男: 그댄 바람소리 무척 좋아하나요
女: 나는요 바람 불면 바람 속을 걸어요

................
男: 그댄 낙엽 지면 무슨 생각하나요
女: 나는요 둘이 걷던 솔밭 길 홀로 걸어요.

배따라기,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동문서답이다. 그는 무엇을 좋아하느냐는 인식론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는데, 그녀는 이미 무언가를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기에 따라서 그것은 대답일 수도 있고, 질문이 채 담지 못하는 삶의 현상을 드러내보임으로써 인식론의 틀을 바꾸어놓는 것일 수도 있다.

 


첫번째 떠오르는 것은 교리와 실천을 놓고 벌어진 종교사의 다양한 대립들이다. 엘리트와 사제 쪽에서는 교리를 강조하고 대중 쪽에서는 실천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아, 둘 간의 불일치가 종종 문제가 된다. 그 중 어떤 경우 사변적 경향과 행위 사이의 위계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사회적 위계와 연결되기도 한다. 뭐, 이런 도식이 항상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믿음과 은총(성사)의 논쟁, 한국 불교에서 교(敎)와 선(禪)의 논쟁, 조선 성리학자들이 이단의 학설이라고 경계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주장 등. 같지 않은 여러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두번째 떠오르는 것은 이론과 자료의 관계. 이론이라는 것은 삶 속에 존재하는 자료를 추상화하기 마련이다. 그가 그녀의 삶으로부터 “그댄 봄비를 좋아합니다”라는 이론을 끄집어낸 것은 옳을 것일까? 비가 오면 추억에 잠기는 행위와 ‘좋아한다’는 언어의 관계, 또 바람 불면 바람 속을 걷는다는 행위와 ‘좋아한다’(그것도 ‘바람소리’를)는 언어 사이의 관계는 명료한가? 그렇지 않다. 그의 이론에 대해 그녀가 “조까”라고 항변할 가능성은 언제든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그가 “무슨 생각 하나요”라고 물었을 때도, 그녀는 “솔밭길 홀로 걸어요”라고 대답할 뿐이다. 인식론과 행위 간의 평행선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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