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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잡기

착한 얼굴

by 방가房家 2023. 5. 22.

세나 때문이다.
한국 드라마를 다운로드받아 보는 나쁜 버릇이 생겼다. <<웨딩>>에 마취되어서이다.
우연히 빨려들어 갔다가, 이제는 세나를 따라 가슴에 멍이 들고 있다. 시간 쪼개어 드라마를 따라가느라고 내 생활도 고달프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세나 얼굴이 수척해지듯이, 내 얼굴도 그렇다. 어느 드라마 팬이 말했듯이, 어서 이 드라마가 끝났으면 좋겠다. 다행히 이제 두 주밖에 안 남았다.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서 시간 날 때 천천히 처음부터 돌려보겠다. 지금은, 볼 때마다 가슴이 쿵쾅거려서, 참 힘들다.

드라마가 내 삶에서 진지한 텍스트가 되는 것은 그리 잦은 일은 아니었다. 순풍을 비롯한 김병욱 피디의 작품들 말고는 없었다. 그런데, 올해만 벌써 세 편째다. <<떨리는 가슴>>, <<내 이름은 김삼순>>, 그리고 <<웨딩>>. 얼마 전 한국 영화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좀 했는데, 내가 한국어 문화권에서 태어난 것이 특권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이런 문화를 먼저 향유할 권리를 갖다니... (아프리카 니제르에서 온 친구가 어디서 평을 읽었는지 요즘 김기덕의 영화를 찾아본다. 나는 김기덕 영화를 찾아주다가 그만 다운로드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고...)
어제 마이클럽 게시판에 가보고서야, 약간 안도했다. 나 혼자 미쳐있는 게 아니었구나, 비록 시청률 10%밖에 안되는 드라마지만, 삶이 흔들릴 정도로 이 드라마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꽤 많구나, 이들에 비하면 나는 무딘 편이구나, 하는 안도감. (특히 이 글)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앨리 맥빌>>이 많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 기억의 적절한 교차, 아주 오래된 여자 친구와 지금의 부인이라는 절대적인 연적의 만남과 연적의 기이한 친분 관계(다만 앨리 맥빌에서 연적간의 만남은 매우 미국적이다. 첫 만남에서 부인은 앨리에게 말한다. “미안해요, 나는 당신이 미워요.” 앨리가 되받아친다. “괜찮아요, 나도 당신이 너무 미우니까.”), 그리고 갈등에서 쉬어가는 공간으로 등장하는 음악 클럽과 시원한 라이브. (여기서 드라마음악을 맡은 오석준의 색깔이 물씬 풍겨난다. 주제곡은 아니지만, 오석준의 옛날 히트곡인 <우리들이 함께 있는 밤>이 흘러나오는 것. 1회에서 류시원이 이 음악에 대해 지원을 때려준다. “음악 좋은데요.” 그러나 행복한 분위기의 이 음악은, 앞부분에서는 꽤 자주 나왔지만, 세나와 승우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이제는 듣기가 힘들다. 아, 가슴이 아프군. 하지만 마지막에는 이 노래를 들을 수 있겠지...) 무엇보다도, 여성의 감성의 결을 섬세하게 따라가며 드라마가 진행된다는것. 그러나, 비슷하지도 않은 두 드라마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싶진 않다. <앨리 맥빌>이 떠올랐다는 것은 그만큼 첫인상이 좋았다는 것이지 다른 뜻은 없다.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야 끝이 없으니 내가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미덕으로 여기는 것 하나만 간단히 이야기하고 싶다. 보기만 해도 혈압이 오르는 승우와 윤수, 이들은 결코 악한 사람들이 아니다. 누구보다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실상 착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서로를 아껴주고 위해주고 하는 착한 짓들이 얼마나 민폐가 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 결코 즐겁지 않은 이 드라마에서 내가 즐기는 포인트이다.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승우와 윤수라는 캐릭터들에 대해, 이 드라마는 이해의 끈을 놓지 않는다. 세나의 시점의 드라마가 전개되면서도 승우와 윤수, 그리고 진희의 시점도 배제하지 않으면서 드라마가 흘러가기 때문이다. 승우와 윤수가 의도적으로 악행을 하거나 위선을 부리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들 삶에서 옳게 여겨온 가치를 지키는 것인데, 그것이 주변사람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입힌다는 역설을 그대로 보여준다. 반면 세나는 솔직함(이게 점점 약해지고는 있지만)을 통해 그 역설을 폭로하고 그럼으로써 불가능해 보이는 부부관계를 진전(희망사항이긴 하지만)시키는 희망을 열어보이는 것이다. 13회에서 나온 세나의 명대사이다.
세나(장나라): 윤수씨 너무 싫어. 그렇게 착한 얼굴을 하고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사람 싫어요.

착하게 사는 것, 정확히 말하면 착한 얼굴을 하며 사는데 남을 힘들게 하는 일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영역이 종교이다. 결코 침 뱉어 줄 수 없는 외양으로 남에게 큰 상처를 남기는 그런 현상들이, 나로서는 꼭 풀어야 할 숙제이다. 세상을 어렵게 하는 것은 악의가 아니다. 얽힌 구조와 맥락이지. 누구나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간다고, 그렇지 않으면 하다못해 피치못할 사정이라는 최소한의 이유는 가지며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자기 세계 내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데, 사회는 그 세계들이 부딪히는 파열음으로 가득하다. 그 옳음에 깔린 자기정당화,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종교의 의미에 매우 가깝다. 그러한 것이 내가 <<웨딩>>을 종교와 엮어보고자 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도대체 10분 앞도 예측하기 쉽지 않은 이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도대체 승우가 하는 말에서 악한 언어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 언어들은 무지하게 폭력적이다. 그런 선한 언어들보다는 세나의 솔직한 언어들(최근 회에서는 세나의 언어도 많이 감염되었다)이나, “사랑은 권력관계야”라고 명쾌하게 상황정리를 해주는 현우 형님(희진)의 말씀이 혼탁한 현실을 밝혀주는 것 아니겠는가. (여기서 현우 형님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을 숨길 수 없다. 나는 <이현우의 싱글을 위한 이지 쿠킹>을 3년 넘게 끼고 살고 있다. 드라마에서도 형님은 예의 요리솜씨를 뽐내어 나를 기쁘게 한다.)

미안하지만, 그것이 드라마 감상의 본능이기에, 승우에 대한 자기동일시 감정이 들곤 한다. 생김새나 능력이 아니라, 범생이로 반듯하게(역시 외양을 말하는 게 아님) 큰 출신 환경이라든지, 상대 여성을 이해못하고 대하는 그 태도들에서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상처를 주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민활한 자기합리화의 능력과 그것을 매끈한 언어로 내놓는 능력이 그러하다. 가끔 적당히 맞는 사람 미국에 데려와서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하던 나로서는(^^) 엄청난 경종이 되는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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