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스터즈의 "Muskarat Ramble"라는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분명 우리말 가사로 부르고 있는데, 주의해서 듣지 않으면 꼭 미국 노래를 듣고 있는 것 같다. 곡조나 분위기, 심지어 가사 발음까지 미국 노래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물론 이 노래는 번안 가요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노래는 전혀 우리 노래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잘 부른 노래이지만, 미국의 노래를 우리나라 사람의 목소리로 충실히 재현하였다는 느낌이다. Mcguire Sisters의 노래를 가져와 부른 것인데, 씨스터즈라는 그룹 이름에서나, 영어를 그대로 유지한 노래제목에서나, 심지어는 앨범에 있는 머리 모양에서나, 몸만 한국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씨스터즈-Muskarat Ramble
이 노래는 64년도에 발매된 이씨스터즈의 [위싱톤 광장]이라는 앨범에 들어있다. 내가 대충 파악하기로는 우리 가요사는 60년대부터 미국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여 70년대 중반에 들어서 우리 색깔을 갖춘 노래들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60년대에는 번안곡 음반 일색이다. 70년대 초반 가요계도 번안곡 중심이긴 하지만 차차 가수들 각자의 음악색을 강화되면고 조금씩 창작곡들이 섞이게 되고, 70년대 중반 포크송의 전성기 때 한국의 정서를 담은 주옥같은 노래들이 나온다. 대충 얘기하면 60년대는 미국 팝송이라는 외부의 형식을 받아들여 우리의 형식을 담는 노래로 소화내는 시기라고 생각된다. 내가 이씨스터즈에 주목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정확하게 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가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어찌 그 오래된 가수에 대해 알 수 있으랴. 가요114에 어느 분이 덧글로 올려주신 설명을 인용한다.
이씨스터즈는 원래 "허니김스"라는 듀엣으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61년 연말 노래자랑 프로그램에서 2위로 입상했었답니다(그때 1위가 이재성씨, 3위가 차도균씨였다나요?).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가요계에 데뷔하는데 63년도에 그 들의 음반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이정자의 가세로 이씨스터즈의 전성기를 누리죠! 위 소개해드린 <워싱톤 광장>이란 음반이 그들이 64년도에 신세기레코드사를 통해 발표한 데뷔음반이고요....
그리고 이 시기에 이씨스터즈의 명곡들... <울릉도 트위스트>, <서울의 아가씨>,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 <목석 같은 사나이> ,<남성금지구역>들을 발표하지요! 역시 이정자씨의 고음이 혼합되어 짜릿 짜릿한 맛을 더해줍니다만....
이정자씨의 독자적인 인기로 나머지 초기 맴버들이 김씨인데 이름을 이씨스터즈로 한 이유도 이정자씨의 독보적인 인기때문이었다나요 어쨌다나요?.... 이런 인기도 67년 2월 이정자씨의 갑작스런 쏠로 선언으로 이씨스터즈는 해체 위기를 맞지만, 김상미씨가 새로 가세하여 이씨스터즈는 李氏가 하나도 없는 제2의 이씨스터즈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 시기에 <날씬한 아가씨끼리>,<샘터에 걸터앉아>,<병아리 데이트> 등의 가요와 <저축의 노래>,<좋아졌네>, <창문을 열면>등 주로 건전가요 위주로 취입하였고, 73년 그들의 데뷔 10주년 기념음반을 옛날 힛트곡으로 재취입하여 발표하였는데, 이정자가 낀 이씨스터즈의 화음과는 사뭇다르죠!!
아뭏든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의 주인공들~"이라는 기치를 걸고 "허니김스"라 출발을 했지만, 콜라처럼 톡쏘으는 짜릿짜릿한 목소리,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최고 옥타브까지 올라갔다던 이정자씨의 가세로... 이씨스터즈의 인기를 더했습니다. 그리고 이정자씨의 탈퇴.. 김상미씨의 가세로 이씨스터즈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지요.
나는 이씨스터즈의 성장에서 팝송의 토착화를 본다. 처음에 미국 노래를 그대로 옮겨놓다시피 노래를 부르던 그들이 “울릉도 트위스트”라는 명곡을 내어놓는 과정이 그러하다. 트위스트라는 낯선 문화에 토속적인 정서를 훌륭하게 담아낸 이 노래는, 지금도 생명력을 갖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른다. "Muskarat Ramble"에서 "울릉도 트위스트"까지는 불과 몇년이 걸렸다. 어떤 사람은 그 변화에서 촌스러움을 느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변화야말로 생명력의 원천이다. 이씨스터즈는 몰라도, 울릉도 트위스트는 누구나 알고 있다.
이씨스터즈-울릉도 트위스트
근대의 우리 삶이 얼추 그러하지 않던가. 서구 문화를 나름대로 소화하여 우리의 삶에 맞는 것으로 재탄생시켜서 쓰는 일은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기독교를 공부하는 것은 그러한 과정을 탐구하기 위해서이다. (아니 그것은 한국 기독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불교나 전통을 주장하는 다른 많은 종교들 역시 “종교”라는 근대의 새로운 틀거리에 맞추어 자신을 재탄생시켰기에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토착화”라는 문제에 나는 관심을 가져왔다. 이 토착화라는 말은 간단치 않아서 오해가 뒤따르곤 한다. 그것은 종교문화의 현실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고, 신학적인 선언의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에 혼동이 된다. 또한 개신교와 천주교에서 각자 이 말에 대한 복잡한 논의의 역사가 있어 여러 뉘앙스가 교차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