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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_자료/음악

초기 한국 천주교 신자들이 부른 성가

by 방가房家 2023. 5. 20.

초기 한국 천주교 자료들을 보다가 성가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자료들을 보았다. (다음 자료들은 모두 전정임의 [초기 한국 천주교회음악]에서 간접 인용한 것이다.) 19세기 말 조선땅에서 생경한 라틴어 성가들이 울려퍼지고 있음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구한말 자료에서 만나는 라틴어는 참 낯설다.

1891년 10월 4일. 저녁 때 소성당의 강복식이 있었다. 마니피캇(Magnificat)을 노래하고 성체강복. ([뮈텔 주교 일기 1], p.18)
1892년 4월 16일. 6시 반에 성 토요일 예식... 프와넬 신부가 엑술텟(Exsultet) 노래. ([뮈텔 주교 일기 1], p. 44)
1893년 우리는 처음으로 진짜 성당의 천장 아래서 크레도를 노래부를 수 있었습니다. ([서울교구연보 1], p.139)
외국 신부들만 라틴어 성가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1962년 바티칸 제2차 공의회에서 자국어 미사의 원칙을 정하기 전에는, 세계 어디서나 천주교회에서는 라틴어로 미사를 드리고 성가를 불렀다.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도 “그레고리오 성가”를 배워(외워) 불러야 했다. 그 모습은, 솔직히 잘 떠올려지지 않는다. 너무 당연하게도 당시 신자들이 성가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불렀을 것이다. 그런 사정을 암시하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봉재 시성가, “앗덴데, 도미네”: 봉재 성시가 되면 각처 상당에서 이 성가를 읊는도다. 교우들이 그 뜻은 알아듣지 못하나 그 곡조만 들어도 슬피 통회하며 기구하는 의미인줄은 가히 짐작하리로다. ([경향잡지], 1931년 3월 15일)
특이한 점은 서양 음악에 익숙하지 못한 어른들과는 달리, 어린아이들은 비교적 이 낯선 음악을 잘 배웠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이 주된 교육 대상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부른 성가에 만족해하는 기록은 꽤 자주 등장한다.
1896년 6월 30일. 성 바오로 첨례, 미사 동안 소년들이 키리에(Kyrie)를 노래했다. 정말 훌륭했다. ([뮈텔 주교 일기 2], p. 84)
1899년 10월 1일. 성 바오로회 수녀님들이 경영하는 고아원에서 수녀님들이 고아들에게 성가를 가르치게 된 것입니다. 끈질기게 보살핀 덕택으로 그들은 노래를 아주 잘 부르게 되었습니다. 주일날 고아들이 목청을 다하여 노래하는 영광송과 사도신경을 듣고 있으면 프랑스 성가대 안에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뮈텔 주교 일기 2], p. 412)
1899년 1월 1일. 주일 9시 30분 미사를 드렸다. 수녀원의 남자 아이들이 아스페르제(Asperges), 크레도(Credo), 엣 베르붐 카로 팍툼 에스트(Et Verbum caro factum est) 구절은, 그리고 끝으로 조선성가를 불렀다. 모두 아주 시원스럽게 불렀다. ([뮈텔 주교 일기 2], p. 355)

 

 
조선 아이들이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떠올리자니, 묘하게도 영화 [미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영화에서 두 선교사가 한 원주민 아이를 집중적으로 훈련시켜 유럽의 고위 성직자(교황?)에게 보내 공연을 하는 장면이 있다. 거의 벌거벗은 원주민 복장을 한 이 아이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라틴어 성가를 완벽하게 불러 좌중의 박수갈채를 받는다. 이 공연의 목적은, 이들 원주민이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 그들이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 마음을 지녔다는 것을 유럽의 성직자들에게 증명하는 것이었다. 조선 천주교인과 남미 원주민의 상황이 어찌 같겠느냐만은, 선교사들이 아이들의 성가 소리를 들었을 때의 ‘사람 만들었다’는 만족감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비슷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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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 관한 기사도 하나 찾았다. 1920년대에 원산 교구에서 불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원산지인 독일에서 직수입되어 천주교에서 먼저 불리다가 나중에 개신교회에서도 받아들였을(정확히 말하면 개신교회의 번역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원산 교구는 독일 수도회인 베네딕트(분도)회가 선교활동을 하던 곳이고, 이 지역에서는 독일계 노래를 많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성탄 밤에는 성대한 미사를 지냈는데... 학생들이 성탄 노래를 불렀는데 조선어 성가 “고요한 밤”이 가장 아름답게 들렸다. ([서울 수도원 연대기], 1924년 12월-1925년, [함경도 천주교회사 자료집2], p.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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