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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얻어배우는 것

시민K와 초기 개신교사

by 방가房家 2023. 5. 19.

며칠 전에 <시민 K, 교회를 나가다>(현암사, 2012)의 저자 김진호 선생님을 내 수업 시간에 초청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현재 한국교회 상황에 대해서는 내가 찔끔찔끔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학생들이 이 책 한권 제대로 읽는 것이 천 배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책을 읽히고 저자를 모시는 시간을 마련한 것인데, 너무나 고맙게도 선생님께서 흔쾌히 응해주셔서 흔치 않은 기회가 생긴 것이다. 올해 내가 받은 여러 행운 중 하나였다.

아래 내용은 그날 토론에서 오간 내용은 아니고 이번에 선생님 책을 다시 읽으면서, 특히 제1부 1장(37-48)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을 메모한 것이다. 


제1부는 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되짚는 부분인데 그 중에서도 1장은 내가 관심 갖는 시대를 다루고 있어서 특히 유심히 읽었다. 이 책에는 각주가 없다. 학술서가 아니라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것이 책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하지만 하고 있는 이야기의 중량감은 학술서를 넘어선다. 여기서 제시되는 핵심적이고 굵직굵직한 진술들은, 사회적으로 학자들에게 요청되었던 내용들이다. 상황 때문에, 성향 때문에, 실력 때문에, 연구 부족 때문에 필요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진술들이 시원하게 제시된다.
일반 논문에서 이러한 내용들을 만났다면 내 반응은 “이 부분에는 각주가 필요해”였을 것이다. 도대체 어떠한 자료를 근거로 그런 진술이 가능한 지를 묻는 것이 학계에 있는 나의 본능이다. 이 책의 이야기들에는 각주가 필요하다. 자료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요청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이 책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책과 저자의 역할을 고려할 때 이 책이 제시하는 통찰들이 연구 주제로서 많은 것을 제시해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1. 1907년 무렵 개신교회의 급성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일본군의 진군 루트였던 평안도 지역에서 군대 폭력을 피해 많은 이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 이 부흥운동의 전사前史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39) 좀 더 강경하게, “교회의 대부흥은 1907년의 대부흥운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산물이었다.”(41)
전쟁과 교회성장의 연관성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인정할 것이다. 예컨대 <한국기독교의 역사>와 같은 교재에도 잘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어디서도 이처럼 선명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비록 성령 운운하는 신학적 설명에서 벗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학자들은 복합적인 배경을 선호하지 이처럼 선명한 진술은 체질적으로 기피한다. 그만큼 위험하고, 종교를 사회적인 요인으로만 설명하기보다는 내부적 요인과 함께 이야기함으로써 무언가 여지를 남겨두고자 하기 때문이다.
 
2. “1893년에서 1983년까지 한국에 파송된 개신교 선교사는 거의 90퍼센트가 미국인이고, 그 대부분은 미국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었다.”(38)
여기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한다. 큰 틀에서 인정하지만 단순화된 측면이 있다고 보이는 진술이다. 특히 초기 개신교 선교사가 근본주의자라는 주장은 재검토가 필요하다. 일단 근본주의는 미국에서 1910년 이후에 등장한 사조라는 점에서 그 이전의 사람들에게 적용하려면 조심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19세기말에 들어온 1세대 선교사들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지만 다양성을 지닌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근본주의가 강화된 것은 1920년 이후로 보는 것이 내 생각인데, 이에 대해서는 내가 연구를 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3. (대부흥운동 때) “종교적인 엑스터시에 이른 대중에게 교회 지도자들이 요구했던 것은 윤리였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했다.……이제 조선인의 삶은 신앙적 분리 실천의 대상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의 문화에 대한 배타성으로 신앙을 해석하게 된다.”(43)
개신교인의 죄의식에 대한, 대단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이 내용을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논증할 수만 있다면 대단한 논문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시도이다.
 
4. “(선교사들의) 복음은 ‘야만적 사회인 조선’과 ‘불신앙’을, ‘선진적인 사회인 미국’과 ‘신앙’을 대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너무나 미국주의적이다.”(43)
기독교 신앙은 미국적이라는 주장이 이 글의 핵심인데, 이것은 초기 개신교 자료만 갖고서는 확실하게 입증되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동의하는데, 이것을 자료를 통해 이야기하는 데는 상당한 논쟁이 야기될 것으로 예상된다. 때로는 자료의 ‘무의식’을 읽어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5. (평양대부흥회에서) “지도자의 몸에 안착하여 그 몸을 위해서만 봉사하는 영, 지도자의 몸을 위해서만 활력을 뿜어내는 영, 그렇게 순화된 존재로 영은 도구화되었다.”(48)
다소 어려운 표현이지만 교회사에서 매우 핵심적인 쟁점을 건드리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교회에서 신비체험을 어떻게 통제하느냐의 문제이다. 위의 인용문에서는 다시 개신교 지도부가 대부흥운동의 신비체험을 완전히 통제한 것으로 묘사한다. 과연 그러한지는 심각하게 연구할 주제이다. 대부흥운동의 체험이 이러한 종교사적 관점에서 해석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6. 다소 뒤의 내용이지만 한국전쟁 이후 반공적인 증오심이 나운몽의 기도원 운동에 대한 열광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한 것(63-64)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더구나 책 말미에서는 한국 개신교가 한국 전통이라는 타자를 포용할 가능성을 여기서 찾기도 한다. “나운몽은 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자 천지신명이고 부처이며 각종 조상신들의 표상을 엮은, 곧 사람들 각각의 심상 속에 함께하는 신성의 이름으로, 그 신성들의 연합체인, 하나이자 여럿이고 여럿이자 하나인 그 신, 곧 그가 믿은 야훼의 이름으로 치유의 기적을 일으켰다. 하지만 주류 기독교에 편입되지 못한 이 전통은 곧 사라졌고, 해석의 전문가들에 의해 언어화되는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223-24)
종교학을 통해 조명되어야 할 중요한 현상을 제시한 것이리라. 열심히 연구하겠다는 말 이외에 내가 더 할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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