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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얻어배우는 것

한국 사회의 시민종교

by 방가房家 2023. 5. 19.

“한국 사회에서 시민종교의 현상탐구: 종교와 시민사회의 소통가능성과 그 방법론”이라는 심포지엄에 갔다 왔다. ‘시민종교’라는 개념에 관심이 좀 있었고 한국 사회에 적용할 수 있을지 궁금하던 터라, 참석했던 자리. 한국의 시민종교를 논하면서 불교, 천주교, 개신교에 대해 각각 발표하는 자리였다. (이런 메모는 주로 불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배운 것을 기록하는 데 소홀한 경향이 있다. 배운 것은 다양해서 정리하기 쉽지않은 반면에, 불만은 하나의 줄기로 꿰어지는 일이 많아서일 것이다.)

 

1. 

애초에 심포 제목을 접했을 때 들었던 노파심은 시민종교를 막연히 좋은 것으로 여기고 발표를 기획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나는 시민종교를 중요한 개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자체로 좋은 것일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시민’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함의를 갖고 있지만, 시민종교라는 말이 그러한 함의를 가질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판단으로 이 개념은 로버트 벨라의 작업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 사회의 기독교적인 분위기를 설명하는데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야구장에서 "God Bless America"를 아무 저항 없이 부를 수 있는 미국 특유의 분위기를 분석하는 데 이 개념의 유용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의 분석 개념이지 선진국이면 가져야 하는 그 무엇은 아니다.
 
첫 번째 불교에 대한 발표는 주최측의 발표였는데, 불행히도 내가 가졌던 노파심을 충실히 구현한 발표였다. “불교는 시민종교인가?”라는 다소 잘못 주어진 질문에, 발표는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 위해 무리하게 진행되었다.
예컨대 불교 성립 당시의 인도사회가 “근대화를 성취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불교는 당시 시민(상업세력)의 여망을 담고서 시대의 질곡을 넘어서는 혁신성을 지닌다. 이것이 “불교가 시민종교로서 위상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루소의 시민종교 개념을 전거로 해서, 종교의 비관용성의 배제라는 측면은 불교의 가치관과 상통한다고 주장한다. 방편설의 예를 들어 불교가 시민사회와 소통하고 시민을 깨침으로 이끄는 방법론으로 가치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말이야 만들기 마련이고, 개념을 자신의 필요에 맞추어 재생산하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도대체 왜 그러한 개념설정이 필요한지는 이해할 수 없다. 불교가 시민사회와 소통할 자질을 지닌 종교라는 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좋은 것인 ‘근대’와 좋은 것인 ‘시민사회’에 불교를 끼워 맞추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아직 그런 자격지심이 필요한걸까? 백번 양보해서 고대 인도의 불교가 시민종교라고 해서 불교가 시민종교인 것은 아니다. 시민종교가 본질적인 속성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당대의 불교에 대한 서술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주장은 한국 불교가 시민종교인지를 운위하는 것과 무관하다.
 
2. 두 번째 천주교에 대한 발표는 천주교와 시민사회의 관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담담히 지적한 글이었다. 이런 반성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 시민사회와 관계를 가지며 활동하며 소통하는 관록이 있는 종단이기에 할 수 있는 반성. 그런 의미에서 격이 느껴지는 발표였다.
 
3. 세 번째 개신교에 대한 발표는 한국 개신교의 근본주의에 대한 이야기에 상당히 할애되었다. 이 주제는 선생님의 삶의 경험과 직결된 주제이기에 귀 기울여 들었지만, 주제에서는 다소 맴돈 느낌이 들었다. 발표는 근본주의적 태도의 극복과 교회의 정치의 결탁이라는 두 이야기 줄기가 느슨하게 공존하는 내용이었다. 자기중심적인 근본주의적 태도를 극복하지 않으면 어떠한 대상과의 소통도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큰 틀에서는 연관성을 찾을 수는 있겠다.
교회의 오류를 간간이 지적하는 선생님의 발표를 공감하면서 듣다가도 간혹 불편해지는 대목들이 있다. 그것은 ‘초자연적 유신론’이라는 기존의 신학을 비판하면서 그 대신 자신의 신학을 들이미는 대목에서이다. 선생은 그것을 (마커스 보그를 인용하며) 범재신론이라고 제시한다. 이하에서는 내가 불편하게 느꼈던 부분에 대해서만 기록해둔다.
 
미국 대통령 케네디의 취임 연설문에서 “나는 전능한 신 앞에서 엄숙히 선언합니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은 미국의 시민종교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선생은 이런 태도를 무리 없이 수용하는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취임 연설문에 등장하는 ‘신’은 물론 특정 종단의 신, 가령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또는 가톨릭이라 개신교의 신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애국가에 등장하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에서의 하느님이 반드시 기독교의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이 ‘신 앞에서 엄숙히 선언한다’고 할 때의 대통령들이 취임하면서 느끼는 어떤 일반적인 초월자를 의미한다.”
미심쩍은 주장이다. 일단 좀 벗어나는 얘기지만, 우리나라에 일반화된 번역이긴 하지만, 나는 'God'을 ‘신’으로 번역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유명사 ‘God’을 일반명사 ‘신’으로 번역함으로써 이 용어는 보편적인 것이라는 후광을 얻는다. 그것은 종교철학이나 신학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번역의 전략이다. 나는 그래서 하느님이라는 번역을 주장한다.(이 이야기는 다른 자리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음.)
위의 언급에서도 신이라는 보편적 번역에 묻어가는 측면이 있다. 미국 대통령이 말하는 것은 하느님이다. 그 하느님은 유대교, 개신교, 가톨릭이라는 유일신교 전통의 하느님이다. 그것이 미국 시민종교의 엄연한 한계이다. 애국가 가사에 하느님이 등장하는 것은 작사가가 개신교인이기 때문이 아닌가? 하느님은 우리 전통에 있는 것이라는 것이 애국가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아니 이해하려는 노력)이지만, 나는 그것은 사후적 정당화라고 생각한다. 선생의 주장은 이런 까다로운 쟁점들을 두리뭉실 넘긴 것이다. [선생은 더 나아가 우리 일상에서 ‘하늘에서 편히 쉬세요’, ‘명복을 빈다’는 언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짐을 지적하면서 미국식 시민종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지적한다.]
발표에서 주장하는 소통, 근본주의의 극복의 이면에는 범재신론이라는 대안적인 ‘신학’이 자리한다. 범재신론에서 신은 모든 것보다 큰 이, ‘초월자’이고 ‘비로 여기에 계신 저 너머’의 존재이다. 기독교인이 이러한 신학을 정립하여 다른 종교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그렇게 발표문에 쓰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태도가 한국인의 시민종교로서 공유되는 것으로서 제시된 것이라면 문제가 된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 신학의 하나이지 ‘보편적 종교’로서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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