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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얻어배우는 것

퀴어 신학자의 강연

by 방가房家 2023. 5. 19.

기독교 내의 동성애 문제에 대한 강연을 들은 지 6년 만에 또 하나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퀴어 신학을 이끌고 있는(그렇다고 들었다) 테오도르 제닝스Theodore Jennings 박사 강연 “교회와 동성애: 호모포비아의 극복을 위하여”였다. 

핵심을 짚어내는 제닝스 박사의 언어의 힘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던 강연이었다. 이 주제에 대해 내가 주워들은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듣는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막연하게 갔던 나의 기대를 훨씬 넘어서는 자리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고개를 돌리 것이며, 그나마 약간 있는 온정적이고 양심적인 이들의 입장은 같은 피조물인 동성애자들도 교회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제닝스 박사가 제시한 의제 설정은, 그가 짜놓은 싸움의 구도는 다른 것이었다. 그저 인정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의미를 가리는 교회의 ‘죄’에 대한 문제제기임을 명확히 한다.
“우리의 논의는 게이에 대한 다소간의 불만스런 수용 또는 관용의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끼쳤던 피해 그리고 교회가 하느님의 말씀에 끼치고 있는 피해에 대한 교회의 회개라는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는 교회가 성sexuality의 문제를 “두려워”한다고 설득력 있게 비판한다. 성의 문제를 죄와 동일시함으로써 보수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성서에서 죄는 억압과 불의, 탐욕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에 대해서 성서적으로 사회적 지도층을 공격하는 데 겁을 먹거나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을 친밀한 만남의 영역에 집어넣고 섹슈얼리티를 인간의 도덕적 실패를 대신할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교회가 보호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근대적인 가족 관념이다. 그러나 사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는 가족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인물이다. 그는 ‘동성애자가 되느니 죽는 것이 낫다는 가르침’이 미국 청소년의 자살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하고, 동성애에 대한 죄악시가 성에 관련해서 정말로 문제가 되는 부분, 예컨대 힘을 가진 이가 저지르는 강간과 같은 사안에 대한 침묵하게 되는 원인이라고 소리높인다.
“한편으로 교회는 죄에 대한 이야기를 성에 대한 이야기로 축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약한 자들과 방어할 수 없는 사람들을 학대함으로써 섹스가 정말로 죄에 관련된 부분에서는 교회가 침묵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교회에 의해서 성사된 이 악마의 거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동성애입니다.”
 
그의 주장은 교회가 성서를 인용하여 동성애를 죄악시하려고 노력하지만, 실상은 성서의 가치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존의 뒤집어진 성서 독해를 바로잡는 독해를 제안한다.
“교회의 호모포비아의 또 다른 희생자는 성서 그 자체입니다. 이전에 노예제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교회와 사회 내에서 여자들의 완전한 성적 평등을 부인하는데 사용된 것과 동일한 해석 기교가 오늘날 호모포비아 문제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호모포비아적인 성서읽기가 성서를 비열한 횡포의 규정집으로 만들었고, 복음의 포도주를 율법적이고 보복적인 비난으로 바꾸었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성서의 예들은 처음 듣는 것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인상적으로 들렸다. 명확한 관점으로 정확한 배경을 갖고 설명하는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해당 구절만 메모해 두겠다.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이방인stranger에 대한 아브라함의 극진한 환대의 윤리를 이야기한다. 그들이 처벌받는 이유는 “약한 이방인을 대상으로 집단적인 강간을 저지르려 하는 행태를 취한 소돔의 불의” 때문이다. 그들의 죄는 폭력, 교만이지 성적인 문제는 언급되지 않는다. 
-<레위기> 18장 22절, 20장 13절에 대해서 개신교만이 율법적인 해석을 보인다. 유대교는 안 그러는데. 그래서 “맹목적이고 경솔한 율법의 종교가 된 기독교를 떠나 은혜의 종교를 발견하고자 유대교로 개종”한 한 제자 이야기를 들려준다.
-성경에 “남색하는 자homosexual”로 번역된 단어들의 잘못. 말라코이(고전 6:9)는 부유하고 권세있는 자들이 옷 입는 방식에 대한 비판을 의도한 단어이며, 아르세노코이타이(고전 6:9, 딤전1:9)는 강간을 의미하는 단어. 모두 권력자들의 폭력을 비판하는 맥락임.
-<로마서> 1:26에서 여자가 본성에 반해 행동한다는 것 역시 권력을 위해 성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
-동성애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을 몇 가지 제시하. 롯과 나오미 이야기.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의 종을 고친 이야기. 원문에서 이것은 한 소년(파이스pais: 발표자는 이 단어에 해당하는 '남자친구'를 정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말해 청중을 즐겁게 해주었다.)에 대한 백부장의 사랑을 보여준다. 그리고 예수가 사랑한 남자 요한.
강연이 끝나고 ‘동성애 허용법안반대 국민연합’의 성명에 반대하는 ‘차별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교인연대’의 성명을 받았다. 동성애에 대한 적의와 폭력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종교집단은 개신교회이고, 또한 미약하긴 하지만 그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 또한 개신교회이다. 이것은 개신교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한 사례일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동성애 문제가 급소에 더 가까이 있는 종단은 남성사제계급이 주도하는 가톨릭교회와 불교가 아닐까? 단순화해서 이야기하자면 개신교회는 가족 개념을 조금 더 오픈하는 정도(?)로 이 문제를 비껴나갈 수 있는 위치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장 강력하게 동성애의 탄압자로 군림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보수적인 성향의 결과에 다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교리적 입장보다도 사회적인 지형도 내에 종교가 어디에 위치하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종교가 정치와 다른 영역이라는 낡은 전제는 이 정권을 마지막으로 폐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한동안은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개신교회의 적대적인 반응이야말로 그들이 보수적인 연대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지금 사정이 아니라면 설명될 수 없다.
 
성서에서 동성애 코드를 읽는 제닝스 박사에게 아전인수라고 반대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후대인들에 의해 끊임없이 편집되고 가필되고 변개되고 또 다른 의도로 번역된 텍스트에 대해 다른 맥락에서 접근하는 것은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읽은 책에서 비슷한 독해를 하나 추가해 놓는다.
[향가 <모죽지랑가>에 대해 해석하면서] 그런데 동아시아 고전 시가에서 사랑과 주로 연관되는 ‘봄’이 왜 하필 여기에서 등장하는가? 그냥 스승이 그리워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었을까? 이 일이 있기 약 150년 전에 죽은 친구 무관랑이 그리워 7일 동안 통곡하다 슬픔에 죽은 저 유명한 사다함도 무관랑과 우정 이상의 어떤 관계도 없었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박노자, “화랑들이 ‘변태’여서 부끄러운가”,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한겨레출판, 2007),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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