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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얻어배우는 것

민족주의 강연(정수일)

by 방가房家 2023. 5. 19.

동서문명 교류사 방면에 독자적인 업적을 쌓아올린 학자 정수일 선생의 강연에 갔다가 예상치 못했던 내용을 듣고 왔다. 처음엔 당혹스러웠지만 듣고 나니 그런 불리한 주제를 고수하는 학자의 양심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민족주의, 아시아의 보편가치”라는 제목은 기이하다. 민족주의와 보편가치는 모순되어 보이는 표현이고, 게다가 이 보편가치는 아시아라는 범위로 한정되어 있다. 이 강연은 이것을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통념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작업이었다. 강연 말미에 정선생님은 “민족주의는 보편적 진보주의이며 국제주의와 상치되지 않는다”고 하며 “진정한 민족주의자는 진정한 국제주의자”라고까지 말한다.

최근 학계에서 ‘민족’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것은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논의일 것이다. 나 역시 앤더슨의 책을 인상적으로 읽은 사람으로서 근대에 민족을 상상하는 방식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이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확신에 찬 입장을 갖지는 못했다. 근대들어 민족 개념이 유달리 강조된 것은 맞지만, 그 전에는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강연은 이런 내 입장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정선생은 민족 발생에 관한 이론을 ‘근대론’과 ‘영속론’으로 잘 정리해서 설명한다. 나처럼 서양이론의 영향 아래 있는 쪽을 ‘근대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론은 “유럽에서는 자본주의 출현을, 한국에서는 일제 강점을 계기로 발생했다는 논리”로 요약된다. 선생은 이 이론을 “유럽의 민족론”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 경우에 교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하였다. 반면에 선생이 속한 ‘영속론’은 다소 세련된 형식으로 제시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비판하는, 민족을 고정불변의 범주로 보는 생각을 벗어나서 수정된 의견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영속론은 “민족은 특정한 역사 시대에 출현해 상당히 오랫동안 존속되는 역사적 변수이지만 영국불멸의 초역사적 상수나 근대에 국한된 역사적 변수는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이를 기반으로 한 민족의 정의定議는 “일정한 지역에서 장기간 공동체생활을 함으로써 혈연, 언어, 경제, 문화, 지역 등을 공유하고 공속의식共屬意識에 따라 결합된 최대 단위의 인간 공동체”이다.
이것은 단순한 요약이 아니다. 우선 ‘근대론’을 정리하면서 서양이론이 우리나라를 설명하는 보편적 이론이 아님을 주장한 것이 눈에 띈다. 더 중요한 것은 ‘영속론’을 정립하면서 서양이론의 가장 큰 기여라고 할 만한 부분, 즉 민족 개념이 혈연으로 정해진 고정불변의 범주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관념이라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강연 말미에 민족주의는 “역사적인 과정에서 형성되고 축적된 생존의 보편가치”라고 이야기된다. 선생의 영속론은 통속적인 영속론에서 많이 수정되어 학문적으로 수용 가능한 형태로 가다듬어졌다. 그가 보는 민족 개념의 핵심은 같은 땅에서 함께 오래 산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이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유럽과는 달리 이 꼴로 모여 산 지 오래되었고, 그래서 민족에 대한 관념은 더 오래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생의 주장의 핵심은 “아시아에서의 민족주의 작동은 유럽(1-2백년)에 비해 유원悠遠”하다는 것이다. [이 정리에 많이 공감했지만, 근대 시기의 민족 개념의 커다란 변화도 설명(혹은 고려)해야 하는 과제도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이후 강연은 민족주의에 관한 여러 주장(혹은 오해)들에 대한 해명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선생이 민족주의라는, 욕을 들어먹는 주제를 굳이 옹호하는 태도에 학자로서의 솔직성이 존재한다고 느꼈다. 강연 중에 선생은 “민족주의는 한국 사회 최강의 이데올로기이며 대중적 정서 깊이 뿌리박고 있는 이념임에도 불구하고 그 기능에 대해서는 부정하거나 오해”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대중들의 믿음에 대해 ‘민족은 신화야’라고 넘어가는 것이 냉소적인 학자가 쉽게 취할 수 있는 태도이지만, 그 믿음의 근저에 어떤 이유가 있을지를, 어렵지만 파고드는 것이 그의 작업이 아닐까 하는 내 특유의 긍정적인 감상마저 들었다.
연구 주제를 봐서도, 자신의 삶 자체를 봐서도 정수일 선생만큼 국제적인 학자도 드물 것이다. 그런 그가 민족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변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선생은 질의응답을 통해 자신의 이것이 학문과 모순된 주장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의 필생의 주제는 문화의 교류(전파와 수용)였는데 이 때 필연적으로 그 교류의 주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문화를 전하고, 또 받아들여 자신의 문명으로 만들어내는 실체적인 단위로서 민족의 중요성을 꾸준히 생각해왔다고 한다. 그런 소신이 있기에 지금의 다민족, 다문화주의 시대에 민족의 의미가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문제를 해결할 모델을 제시해준다는 독자적인 주장을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민중의 소리>에서 퍼온 사진을 첨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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