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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얻어배우는 것

며칠 전 강연회

by 방가房家 2023. 5. 19.

(2005.10.10)

유명한 사람이 학교에 왔다.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내가 대학 새내기 때 선배들은 학회란 걸 만들어 후배들을 열심히 모았는데, 나는 뺀질거리는 후배였을 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내가 가지 않았던 역사학회 “커리”엔 분명히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전쟁의 기원>>이 있었을 것이다. 나야 한국 현대사에 관심없이 살았던 사람이라 그냥 집에서 뒹굴대다가 시간 맞추어 쓰레빠 끌고 강연장에 갔지만, 조금이라도 현대사를 아는 사람에게 그를 직접 보는 것은 전율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를 한국전쟁에 정통한 정치학자 정도로 소개하는 것은 (미국의 맥락에서는 당연한 거지만) 맥빠지는 일이다. 한국 사람에게 그는 일개 학자 이상이다. 1980년대 초에 그는 한반도 분단 정국의 책임이 미국의 외교정책에 있으며, 마침내는 한국 전쟁을 초래했음을 밝히는 방대한 책을 저술했다. 학술적인 가치도 독보적인 것이지만, 그가 한국의 진보 진영에 끼친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었을 것이다(라고 나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볼 뿐이다.) 당시의 상식으로서는 간첩이나 할만한 이야기를 미국 학자가 튼실하게 해주었고, 그것은 이후 한국 사회 변화의 자양분이 된 것이다. 한국 사회는 많이 변했고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 이후 지금에 이르러서는 커밍스의 이야기를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한반도 정세와 연관지어 부시 대통령의 행동거지를 걱정할 정도로 성숙한 사회가 되었다. 20년만의 변화다. 커밍스는 이 변화를 잘 알고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자기 강연에 남한 학생들이 와서 뻘소리 많이 했는데, 이제는 전후 세대의 인식이 달라져 있음을 잘 안다. 그는 촛불시위 등 최근 사건들을 언급하면서, 미국에서는 그걸 반미감정(Anti-Americanism)이라 부르지만 그것은 잘못된 명명이고 사실은 부시 행정부의 정책에 대한 반대라고 명쾌하게 이야기하였다.

집에서 브루스 커밍스에 대한 한국의 글들을 조금 검색해보다가 말았다. 대부분 요즘 번역된 그의 신간에 대한 서평들이었다. <<한국전쟁의 기원>>도 최근에 1권까지만 번역(원래는 해적판 번역으로 유포되었다)될 정도로, 최근에야 그에 책이 소개되고 있었다. 그에 대한 인식도, 용공학자라는 딱지를 벗은지 얼마 안 되었다는 정도의 느낌이다. 그에 대한 깊이 있는 글이 눈에 빨리 띄지 않아 검색을 그만 두었지만, 그보다는 조선일보 부류들이 그를 석학이니 하며 점잔 떨며 서평하는 꼬라지를 보기 싫어서였다. 죄없는 최장집 교수를 물어뜯을 때는 언제고, 그들이 보기엔 빨갱이 중에서도 빨갱이를 미국 교수라는 이유로 높이고 있다. 밸도 없는 녀석들. 사실 그들 세계관에서 브루스 커밍스는 모순이다. 미국 교수라면 후쿠야마 같은 고명한 학자만 있어야 할텐데, 커밍스 역시 명문 대학의 교수라니.
포스터에는 “‘악의 축’ 안의 북한”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지만, 그건 부제고 강연의 원제는 “역사에서 절연되다(Decoupled from History): 악의 축 안의 북한”이다. 제목에서 강연의 목적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북한을 악(evil)이라는 종교적 범주 안에 넣는 것은 그들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한반도 정세를 설명하며, 북한의 의지가 아니라 부시의 한반도 정책이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임을 미국 청중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강연의 목적이었다. 미국 학생들이 강연을 잘 이해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듣기엔 좀 자세한 부분이 많아 어떨까 싶은데, 북한 뉴스는 여기서도 많이 다루어지는 거니까 잘 아는 애들도 있겠지.

국제 정세에 대한 딱딱한 이야기 와중에, “햇살이 너무나도 아름답던 오후였습니다”라는 말이 갑자기 귀에 꽂힌다. 김대중 대통령이 대북 정책을 발표하던 날을 묘사한 말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햇볕 정책에 대한 그의 애정이 물씬 풍겨난다. 김대중 대통령 당시 남북관계가 진전되고,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이 거의 성사되었다가 대선과 너무 촉박해 이루어지지 못했던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 거의 클라이맥스였다. 그 뒤 부시 대통령의 닭짓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하지 않는다. 말 안해도 알잖아라는 태도였다. 최근 상황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미국의 외교정책이 엉망인 와중에도 한국 정부가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 정도. 사실 그 이전에는 미국의 외교정책만이 유의미한 변수였다. 한국 전쟁이후 최대의 위기였던 1994년만 해도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어찌되느냐가 중요했고 남한 정부는 아무 변수도 못되었다.(그 당시 상황을 다시 듣는데 화끈거렸다. 과연 그 때 김영삼은 상황을 알기나 했을까.) 그러나 지금은 남한 정부가 주도해서 성과를 조금씩 얻어가고 있다는 것. 시간이 부족해 최근 상황은 그렇게 간단히 언급되었다.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은 성의없이 멀리서 그냥 찍었더니 흐릿해서 쓸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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