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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메모

원시문화로 배운 종교학

by 방가房家 2023. 5. 18.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 <<원시문화: 신화, 철학, 종교, 언어, 기술, 그리고 관습의 발달에 관한 연구>>, 유기쁨 옮김 (아카넷, 2018).
온갖 사례로 가득한 이 두꺼운 책을 읽으며 행복했다. 이 변태 같은 감정은 무엇일까? 유럽과 세계 각지로부터 수없이 쏟아지는 자료들, 자료의 엄밀성이 확인되지 않은 무방비 상태에서 자료들에 압도당할 때면 생각의 길을 잃고 무엇을 읽어내야 할지 멍해지기 마련이다. (다시 읽으면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황금 가지>를 읽을 때는 확실히 그랬다. 그런데 타일러의 글은 자료의 홍수 속에서도 신기하게도 종교학사를 장식하는 주요 주제들이 도드라져 보이는 신비한 경험을 했다. 특히 애니미즘 서술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번역판의 2권을 읽을 때 황홀감이 극에 달했다. 종교가 없는 민족이 있다는 보고를 논박하면서 종교의 기본적인 정의를 제안하는 애니미즘 이론의 첫 부분은 전부터 주목했던 내용이다. 이번에 번역본 덕분에 추가로 음미하게 된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영혼 교리의 다양성(부족사회의 정령, 동아시아의 귀신, 기독교의 영혼을 연결하는 그의 강력한 논의), 망자와 음식을 통한 교류, 저승 관념의 비교, 페티시즘을 영혼 이론 내에 포함, 영혼의 물질성 여부, 퇴화 이론의 철저한 논파, 선교사에 의한 부족사회 자료 오염에 대한 민감한 태도, 기독교(혹은 선교지에서 이해된 기독교)의 이원론적인 속성 등.
그의 저서 이후 종교학사에서 떠오르게 될 주제들이 그의 자료 배치 안에 녹아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료의 나열이 아니라 주제 의식에 따른 배열을 읽어내면서, 오랜만에 종교학 책을 읽은 뿌듯함을 느낀다. 종교학을 한다는 것은 선배들이 고민했던 문제 의식의 공유 아닌가. 아마도 공유된 주제에 목말랐나 보다. 그래서 이 책을 종교학을 하는 이들과 함께 나누면서 이 거목으로부터 후대에 어떤 꽃이 피어올랐는지를 떠들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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