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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메모

괴테의 이파리, 벤야민과 엘리아데의 현상학

by 방가房家 2023. 5. 17.

조너선 스미스가 엘리아데의 "종교형태론"에 붙이는 주석에서 괴테의 식물 형태론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을 때 좀 황당했다.(<<Relating Religion>>의 2장을 참고할 것) 처음 듣는 괴테의 식물학 책도 신기했거니와 엘리아데가 직접 언급도 하지 않은 책을 <형태론>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이론으로 제시한 것도 낯설었다.

그런데 괴테의 이파리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다른 사상가를 만나게 되면서 그 이야기가 조금 덜 낯설게 되었다. 그 사상가는 발터 벤야민이다. 그가 받아들인 괴테를 통해서 엘리아데가 받아들인 괴테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얻었다. 더 나아가 ‘현상학’이라는 전통에 대해서도 전보다 이해하게 되었다.

엘리아데(조너선 스미스가 이해한 엘리아데를 말함. 이하 마찬가지)와 매우 비슷하게도, 벤야민에게 괴테가 영향을 미친 부분은 원형상/원형 개념이다. (이 개념은 ‘기원’과도 관련을 갖는다. 벤야민은 “<독일 비극의 기원>에서 개진한 기원 개념이 원현상이라는 괴테의 근본 개념의 엄정하고 불가피한 전이”임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한다. 기원 개념에 대해서는 최근에 <독일 비애극의 원천>이라고 번역된 책들을 찾아보아야 겠다.)
벅 모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벤야민이 찾아낸 19세기의 ‘이미지들’은……현재의 기원을 발견할 수 있는 감각적 원현상(Urphänomen)이다. 벤야민은 원현상이라는 용어를 자연 형태론에 관한 괴테의 글에서 빌려왔다.……괴테는 이러한 구조의 원형적 원형식(archetypal ur-form)이 생물학적 생명의 본질을 드러내준다고 믿었으며, 나아가 이러한 원형식이 경험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수잔 벅 모스, 김정아 옮김,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2004), 101.]

괴테의 식물학의 의미에 대해서는 게오르크 지멜이 설명해준다.(1913년) 이 구도에 따르면 원형상은 이데아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통해 드러난다. “(원형상은) 마음속의 광경일 뿐인 것 같지만 때때로 현실로 ‘주의 깊은 관찰자의 눈앞에 노출된다.”(102) 이러한 이해는 이전의 이분법을 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지멜은 이렇게 말한다.

원형상은 이러한 괴리[객관과 주관, 보편과 특수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고자 한다. 원현상은 시간 속에서 관찰된 무시간적 법칙 바로 그것이다. 원현상은 특수한 형식 속에서 무매개적으로 드러나는 일반이다. 그런 것이 존재하기에 그[괴테]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최선의 방법은 모든 사실이 이미 이론임을 포착하는 것이리라. 하늘의 푸른빛은 우리에게 색채론의 근본 법칙을 밝혀준다. 현상의 이면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현상 자체가 이론이기 때문이다.”(102-3)

지멜을 통해 괴테의 원현상 개념을 받아들인 벤야민은 이것이 파리를 비롯한 유럽 도시에서 관찰한 풍물들(엄밀하게 말하면 경제적 사실들)을 분석하는 자신의 작업의 구도이기도 함을 분명히 인식하였다. 그의 작업은 “역사적 이미지들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재현하여 자본주의적-산업주의적 경제 형태를 훨씬 순수하고 맹아적인 단계에서 가시화하는 것”(104)이었다. 벤야민은 자기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사실들을 가지고 구성할 것. 이론을 완전히 제거하고 구성할 것. 괴테가 형태론에 관한 글에서 시도했던 것. 이런 시도를 한 사람은 괴테뿐이다.”(104)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나는 괴테의 개념을 자연의 영역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옮겨왔다”(103)

엘리아데와 벤야민은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두드러지는 사상가들이다.(예를 들어 사회주의에서 종말론적인 모티브만을 읽어내는 엘리아데는, 벤야민이 보았다면 철부지에 가까운 사람이었으리라. 과거의 모티브가 현실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분석이 결여된 소박한 관찰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괴테의 이파리 이야기를 모델로 현상으로부터 구조를 파악하는 구도는 두 사상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벤야민은 자신의 프로젝트에서 “나뭇잎에서 풍부하고 다양한 경험적 식물 세계가 펼쳐지듯”(104) 파리의 아케이드에서 일련의 역사적인 형태들이 펼쳐지는 것을 찾고자 하였다. 엘리아데는 다양한 종교 현상에서 이러한 펼쳐짐을 찾고자 하였다. 그는 펼쳐짐의 근원이 되는 원형적인 이파리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그것이 <종교형태론> 작업의 동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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