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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만남

카베사 데 베카 읽기

by 방가房家 2023. 5. 16.

호세 라바사의 다음 책은 서구인들이 아메리카와의 초기 만남에서 남긴 자료들의 식민지적 글쓰기를 분석한 것이다. 그 중에서 카베사 데 바카의 글을 다룬 1장을 읽었다. 카베사 데 바카의 글에 대해서는 전에 정리한 적이 있다.(주술의가 되었던 탐험가, 카베사) 여기서 <<난파기(Naufragios)>>로 약칭되는 카베사의 글은 우리나라에서 <<유럽인 최초의 아메리칸>>(숲, 2005)로 번역되어 나와 있다.

José Rabasa, <<Writing Violence on the Northern Frontier: The Historiography of Sixteenth-century New Mexico and Florida and the Legacy of Conquest>>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0).
 
라바사의 논지는 카베사의 기록이 그간 낭만적인 쪽으로 신비화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원주민에 대한 동정적 시선이 담긴 텍스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의 기본적인 구도는 스페인이 추구한 이른바 ‘평화로운 정복’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텍스트는 카베사가 탐험 이후에 식민관료로 일하면서 남긴 기록과 연장선상에서 읽혀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 중에 흥미로운 대목이 꽤 있다. 저자는 이 텍스트에 유럽과 아메리카의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고 보았고 그 공존을 기묘한(uncanny) 것이라고 불렀다. 기묘함(the uncanny), ‘언캐니’라는 영어 단어를 그대로 유지하고픈 유혹이 드는 이 개념은 프로이트의 유명한 분석으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우리나라의 프로이트 전집에서는 “두려운 낯설음”(Das Unheimliche, the uncanny)이라고 번역되었다. 글의 맥락에서는 틀리지 않는 번역이라고 생각하는데, 일반적인 번역어로 쓰기에는 거추장스럽다.
 
이 ‘기묘한 공존’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그것이 카베사의 텍스트가 오랫동안 이해되지 못한 이유라고 저자는 지적한다.(다음 인용문은 문학비평의 용어들이 사용되어 꽤 번역하기 까다로웠다. 나는 보통 'magic'는 주술, 'reality'는 실재로 번역하는데, 문학 쪽의 용례를 따라 마술, 현실로 하였다. 사실 마르케스의 소설에 대해 흔히 말하는 마술적 현실주의는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불리는 것이 더 일반적인데, 리얼리티를 사실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논평자들은 ‘노벨레스크(novelesque)’함(의도되어 만들어진 이야기)을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와중에 카베사 데 바카의 책이 서구 합리성의 상식에는 이질적인 경험을 진술한다는 점을 놓친다. <<난파기(Naufragios)>>의 마술적 현실주의(the real maravilloso, magic realism)는 단순히 미적인 것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선다. 접촉 지역(contact zone)에는 적어도 그 세계의 개념들이 흔히 근본적으로 공유불가능한(incommensurable) 두 사회방언(sociolect, 주어진 사회 집단의 현실(실재)을 규정하는 실천)의 만남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마술적 현실주의는 다른 문화(마술의 현실, the reality of magic)를 표상하는 것(현실주의의 마술, the magic of realism)에 얼마나 많은 모순이 얽혀 있는지를 드러내준다. 그러나 근본적인 공유불가능성이 두 (공유불가능한) 세계들이 한 인식 내에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존재할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순이란 것은 한 세계를 다른 세계로 번역하고자 시도한 결과로 나타나는 법이다. 카베사 데 바카는 기록에 의존하면서 마술(주술)이 존재하는 관념과 마술이 존재하지 않는 관념을 동시에 전달한다. 비평가들은 <<난파기>> 안의 두 세계의 기묘한(uncanny) 공존을 계속적으로 억압해왔다.(51)
두 세계의 공존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 세계의 언어로 ‘번역’해서 받아들이려는 시도, 그것은 서양 독자들의 텍스트 수용의 역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텍스트의 제목이다. 저자는 ‘난파(難破)’가 서양 독자들에게 갖는 독특한 매력을 설명해주는 데, 이 부분은 내게 특별히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서양 최초의 출판물인 <<하멜 표류기>>가, 표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원래 제목인 <<항해일지>>가 아니라 <<표류기>>로서 서양에서 유통되었던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멜 텍스트의 수용사에 대해서는 “하멜의 한국 종교 서술”을 참조할 것.)
수용의 관점에서 볼 때, 전(前) 제목이었던 <<La Relación>> 대신에 <<난파기(Naufragios)>>라는 제목이 채택되었다는 것은 이 텍스트의 수사적 장(the tropological field)을 보여준다. 우리는 왜 1749년 판본의 편집자가 <<기적(Milagros)>>이라든지 <<순례(Peregrinajes)>>, 혹은 <<카베사 데 바카의 모험(Las aventuras de Cabeza de Vaca)>>--<<난파기(Naufragios)>>라는 제목이 처음 나왔을 때 다니엘 대포우의 <<로빈슨 코로소의 모험(The Life and Strange Surpris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이 이미 출판되어 있었다. 이것은 노벨레스크 장르 최상의 예에 근접한 제목이리라--가 아니라 <<난파기(Naufragios)>>를 선택하였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기적>>이라고 불릴만한 성격이나 카베사 데 베카의 감화력이 사색과 논쟁의 주제가 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강력한 모티브는 난파라는 은유이다. … 카베사 데 바카가 난파를 겪었기 때문에 그의 설명은 곧바로 다른 것보다도 종교적인 독해의 대상이 되었다. 난파는 물질 문명의 상실, 카오스와 사회적 아노미로의 전환을 함축하는 것이지도 하지만, 서구적 이성이 그 한계와 창시자와 대면하는 세계로의 전환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대로 카베사 데 바카의 주술 경험은 해석에 가장 저항하는 것이다. <<난파기>>의 독자들은 주술을 억압하고 주술을 하느님에 의한 기적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카베사 데 바카를 정복의 수호성인으로 바꾸었다.(54)
저자는 카베사의 치료 행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놓고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설명을 끌어들이는데, 그 설명이 매력적이다. 그것은 <<구조 인류학>>에 있는 두 편의 논문, "The Effectiveness of Symbols"와 "The Sorcerer and His Magic"에서 인용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주술사의 치료행위에서 중요한 점 둘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샤먼은 아픈 여자에게 ‘언어’를 제공한다.”(57)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술사의 힘이 발휘되는 것은 “주술사와 단골 사이의 자리가 정해지고 규정되는 관계성이라는 일종의 중력장”(58) 내에서라는 것이다. 주술의 효력과 믿음의 관계를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리라.
 
1989년 멕시코에서 카베사 데 바카에 대한 영화가 하나 제작되었다. 제목은 <<카베사 데 바카(Caveza de Vaca)>>. 저자는 영화에 대한 비판도 곁들인다. 두 세계의 공존에 대한 몰이해가 빚은 상용구들이 영화에 가득하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것이기도 한데, 영화는 카베사 쪽을 빛의 세계로, 원주민 쪽을 어두침침한 세계로 그린다. 원주민의 세계는 각종 미신과 주술로 점철된, 석기 시대와 다름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원주민 세계를 그리기 위해 상관없는 각종 아메리카 자료들이나 인류학 보고들이 동원되어 생긴 우스꽝스러움은 보너스라고나 할까.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는 영화인데, 유투브에 영화의 예고편이 올라와 있어 구경할 수 있다. 이 편집화면에는 저자가 언급한 내용들도 꽤 있어 책을 읽을 때 도움이 되었다. 영화의 분위기가 충분히 감지된다. 장면 중에서 주술 행위를 묘사하기 위해 물가에 사람 형상을 크게 그려놓고 거기에 창을 꽂는 대목이 있다. 그 순간은 무라야마 지준의 사진에서 보았던, 우리나라에서 말라리아를 쫒기 위해 한 풍속과 어찌나 비슷하던지... 우연한 일치이지만 흥미로워 올려놓으니 비교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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