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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만남

토도로프가 분석한 아메리카 타자와의 만남

by 방가房家 2023. 5. 16.

식민지 타자와의 만남을 다루는 고전, 츠베탕 토도로프의 <<아메리카의 정복(The Conquest of America: The Question of the Other)>>(New York: Harper & Row, 1984)을 읽다가 메모를 남김. 토도로프의 책은 우리나라에 여러 권 소개되었고, 이 책도 우리나라 어디에선가 번역이 진행 중인 것 같다.
주제상 필요해서 읽고 있는 책이긴 하지만, 글쟁이로서의 토도로프의 능력에 매료되지 않을 수가 없다. 치밀한 분석 끝에 멋들어진 문장으로 마무리하는 능력도 일품이거니와, 아메리카 정복을 다루는 이 책의 내용을 정복, 사랑(!), 지식이라는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중첩된 세 영역을 통해 풀어나가는 센스는, 논문을 쓰면서 머리가 굳어버린 나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것이다. 정복과 사랑과 지식은, 연애 사업에 있어서도 기묘하게 중첩되어 있는 영역들 아닌가! 멋지다.

전반적인 내용을 요약할 수는 없고, 앞 부분에서 필요한 한 두 대목만 인용한다. 이 책은 콜럼버스의 항해록 분석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로서는 책 내용 중에서 유일하게 분석된 자료를 참고하면서 볼 수 있는 부분이었는데, 분석이 높은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콜럼버스는 다름을 인지하지 않았고, 자신의 가치들을 그 위에 덧씌웠다.”고 이야기하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멋진 멘트를 날린다.
어떻게 해서 콜럼버스는, 한편으로는 타자를 ‘고귀한 야만인’(noble savage)로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잠재적인 노예가 되는 ‘더러운 개’로 인식하는, 분명히 반대되는 두 신화들을 짬뽕으로 지니게 되었을까? 그것은 두 신화 모두 공통된 기반, 즉 인디언들을 인식하는 데 실패하였다는 점, 그리고 그들이 다르지만 동등한 권리를 지닌 주체임을 인정하기 거부했다는 점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했지만 아메리카 인들은 발견하지 못했다.(49)
스페인의 아즈텍 정복을 기호론으로 분석한 부분은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즈텍 인들의 스페인 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의 실패’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저자가 처음에 말한대로 그들이 정복당한 것에 대한 인과론으로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분명 스페인 인을 만나는 과정에서 인식의 실패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정복당했다는 것은 비약이다. (나는 저자의 주장이 그렇게 요약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그렇게 말한 대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말한 대로, 콜럼버스 역시 커뮤니케이션의 실패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정복자와 비정복자를 만드는 것은 기호론의 영역 바깥의 문제가 아닐까?
이런 특수한 방식의 커뮤니케이션 수행 방식(인간 사이의 소통의 차원을 무시하고 세계와의 소통을 우선시하는 방식) 때문에, 인디언들은 처음 만남에서 스페인 사람들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 특히 스페인 사람들이 신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정복과 식민화의 역사에서 매우 드믈 것이다.(멜라네시아에서 이런 현상을 볼 수 있고, 쿡 선장의 슬픈 운명도 이런 현상 때문이다.) 이것은 오직 타자의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 다시 말해 타자를 동등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존재로 인식할 수 없었음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75-76)
다른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스페인 사람을 신으로 여겼다는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믿음은 ‘맹목’적이지 않으며, 언제나 현실과 이상 간의 갈등이라는 회의적인 사유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현대인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즈텍 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러한 점에서 이 문제는 위의 인용문에서 저자가 건드린, 하와이에서의 쿡 선장에 대한 반응을 둘러싼 인류학계의 논쟁, 마샬 살린스와 오베이서커 간의 논쟁의 쟁점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논쟁점은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고, 이어지는 대목에서 ‘바바리안’으로 대표되는 타자와 언어의 관련성에 대해서 저자는 참 예쁘게 잘 써 놓았다. 써먹을 일이 있을 것 같아 메모해 놓는다.
낯선 자에 대한 최초의 즉각적인 반응은 그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열등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사람이 아닌 것으로 상상되기도 하고, 사람이더라도 열등한 야만인(barbarian)으로 상상되기도 한다. 그가 우리의 언어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이고, 콜럼부스가 계속 믿었듯이 말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유럽의 슬라브 인들은 게르만 이웃들을 네멕(nemec), ‘벙어리’라고 불렀다. 유카탄의 마야 인들은 톨텍 침략자들을 누놉(nunob), ‘벙어리’라고 불렀다. 카크키켈 마야 인(Cakchiquel Mayas)들은 맘 마야 인(Mam Mayas)들을 일컬어 ‘말더듬이’나 ‘벙어리’라고 했다. 아즈텍 인 자신들은 베라 크루즈(Vera Cruz) 남쪽 사람들을 노노우알카(nonoualca), ‘벙어리’라고 불렀고, 나와틀 어(Nahuatl)를 못하는 사람들을 테니메(tenime), ‘야만인’ 혹은 포폴카(popoloca), ‘미개인’이라고 불렀다. 아즈텍 인들은 문화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은 희생에 사용되거나 먹을 수도 없다고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 대한 경멸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의 신은 야만족 사람들의 살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신의 입에 그들은 누렇고 딱딱하고 맛없는 양식이다. 그들은 낯선 자들이고 낯선 말을 한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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