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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선교사문헌

사무엘 마펫의 서한 중에서 메모한 것들

by 방가房家 2023. 5. 16.

요즘 한국에 온 기독교 선교사들의 자료들을 검토하는 중이다. 참고할만한 부분이 있어서, 전에 <<마포삼열 목사의 선교 편지(1890~1904)>>(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0)를 읽다가 메모해 둔 것을 다시 올린다. 마펫은 평양지역 선교로 유명한 선교사이다. 한국 개신교의 초기 지형이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불린 평양을 중심으로 형성되게 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한 지형 형성 과정에는 서울을 근거로 한 언더우드와의 신경전이 존재했던 것 같다.)



이 책에는 한국 개신교 선교 초기의 중요한 보고문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마펫이 해외선교본부 총무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가 주를 이루지만, 그 외에도 그래함 리, 언더우드, 기포드, 엘리스 마펫 등 동료 선교사들의 보고서와 마펫이 가족들이나 동료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어 당시의 선교 상황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집이다. 보고문이 중심이기 때문에 우선 선교 정책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한국 개신교인들의 신앙 양태를 엿볼 수 있는 대목들도 가끔 등장한다.

Ⅰ. 편지 수록 기간 중 사무엘 마펫의 주요 활동
1890. 1.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서울에서 6개월간 어학공부
1890. 8. 제1차 전도여행(평양, 의주, 솔내)
언더우드로부터 예수교학당(후에 경신학교) 인수, 교육 사업
1891. 2. 제2차 전도여행(개성, 평양, 만주, 함흥, 원산)
1891-93 제3차 전도여행(가장 광범위함, 평안도·황해도 일대)
1893 평양에 선교부 설치, 본격적인 전도활동으로 많은 교회 설립, 평양장로회신학교 설립
1904-24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장으로 재직

①마펫의 신학적 태도

행정적인 사실을 주로 다루는 이 자료에서 그의 신학을 드러내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장로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뚜렷이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공식적으로 자신의 선교회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저희 한국선교회는 현재 칼뱅주의 신조를 고수하는 정통 장로교인들로 이루어져 있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습니다(107).” 그가 장로교인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생각은 다음 글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는 게일을 선교회에 가입시키기 위해 추천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게일은 철저한 장로교인으로서 성화된 삶에 기본이 되는 모든 위대한 교리들에 있어서 건전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성경의 영감성과, 칼뱅주의 신학 체계와, 선교사역의 성공을 위한 성령 임재의 필요성을 확실히 믿었습니다(118).” 이 언급을 통해 그는 장로교인이 지녀야하는 신학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신학적 태도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장로교인으로서 어느 정도 교파적 배타성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천주교에 대해서는 매우 강한 적대감을 갖고 있으며, 성공회의 활동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감리교에 대해서는 표면적인 반감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리 우호적이지도 않다. 그는 잠시나마 감리교인 맥길 박사를 선교회원으로 추천한 데 대해 후회하기도 한다. 당시가 선교 초기임을 감안할 때, 양 교단간의 협력에 대한 언급이 거의 전무한 것은 마펫의 배타적 성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복음의 전도에 있어서는 ‘단순한 복음의 진리만을’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저는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이 진실되게 추진되고 있음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교사역의 초기부터 오직 분명하고 단순한 복음의 진리만을 이 백성들에게 전하였고 이 진리의 말씀이 이곳 한국인들의 자발적 노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478)

②선교 활동

이 자료집의 가장 많은 내용을 차지하는 것은 선교 정책에 관해서이다. 선교 예산의 문제(사업비 확충과 건물구입비 요청, 예산 증액·삭감), 선교사 인력 충원 문제(게일의 선교회 가입 문제, 선교 사역지와 사업 확장에 따른 추가 인력 요청), 신상 변동(선교사의 적응 문제, 질병과 사고, 개인적 평가), 선교 정책 방향(전도 사역, 출판 전도, 의료 전도, 교육 활동의 비율 조정 문제) 등이 그 주요 내용을 이룬다.

ㄱ. 상황인식
이러한 선교 행정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마펫은 특출한 능력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선교사들의 서한에 비교해볼 때 더 객관적인 상황판단에 근거한 건의를 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실제로 집행된 선교 활동은 마펫의 건의대로 이루어 진 것이 많다는 점을 보아 선교부 역시 마펫의 재능을 인정하고 그의 의견을 존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느 한국에 처음 부임할 때부터 냉철한 상황인식을 보여준다.
사실 고국에 있을 때에 들었던 한국이 복음에 대해 환호한다는 이야기 등등은 이곳에 와보니 거의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씨는 따뜻한 사람들이지만 그들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사역은 매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제가 믿기로는, 선교사가 한 사람당 1달러만 주면 수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줄 수는 있겠지만, 정말 진실되게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들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167)

한국에 처음 들어온 선교사들의 들뜬 반응(예를 들면 언더우드)에서 그는 이미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해외의 한국 상황에 대한 평가를 시정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주목할만한 은혜의 역사가 한국인들 가운데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교사에게서 듣지도 않고, 선교사를 보지도 못한 수천 명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위의 내용이 여기저기에 인쇄되어 돌아다니니 유감스럽습니다. (109)

그는 한국인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로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숫자는 많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지적 관심과 신앙을 구별한 것이다. 그는 세례를 주는데 엄격하고자 했으며 신자 관리에도 소홀하지 않으려 힘썼다. 때문에 초기에는 많은 세례자를 얻지는 못했지만 확실한 소수의 신자들을 얻었고, 그렇게 해서 놓인 튼튼한 기초는 이후의 폭발적 성장의 기반이 된다. 그의 신자 관리의 엄격성(그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은 한국인의 신앙 양태를 형성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ㄴ. 평양 개척
마펫이 한국 선교에서 남긴 가장 큰 자취는 한국의 예루살렘 평양을 일구어냈다는 점이다. 한구에 오자마자 곧 북부 지방 선교를 위한 준비를 하였고, 여러 차례 여행 끝에 의주와 평양을 놓고 고민하다가 평양을 최적지로 선택한다. 평양이 처음부터 선교사들에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배타적이었다.
저희가 길거리를 걸어갈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람들이 종종 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에게 직접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희에 관한 것이었으며 아이들이 저희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이전까지 조용하고 차분했었는데 이제는 시끄럽게 떠들고 무례했습니다……. 그 원인이 이곳에 있는 두 명의 영국성공회 소속 선교사들의 행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들은 소년을 거칠게 대했으며, 그 때문에 도시 밖으로 쫓아내겠다는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그들과 혼동되었기 때문에 며칠간은 그런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199)

게다가 당시 평양감사는 반기독교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이어서 여러차례 교묘한 방해를 받는다. 그럼에도 마펫은 추진력있게 선교를 진행시켜 나갔고 놀라운 성과를 얻는다. 그 결과 평양은 교인수(의 증가)에 있어서나 종사하는 선교사의 숫자로 보나 서울을 능가하는 선교 구역이 되었다. (1900년대 초 평양엔 5명의 선교사가 전도를 담당한 반면, 서울은 순수하게 전도에만 전념하는 선교사가 1명(밀러)밖에 없다고 억울해 하는 언더우드의 편지 참조).

ㄷ. 선교 정책
선교사들끼리 가장 논쟁이 되었던 부분은 어떤 방면으로 선교를 주력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것은 자신의 활동 영역과 지원비에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들 논쟁의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선교사들이 첨예한 의견 대립을 보였음은 간간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의료선교사들은 계속적인 지원 증액을 요청해서 의료 설비를 갖추고 일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다른 선교사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것은 덜 시급한 문제였을 것이며 오히려 의료선교사들이 전도에는 신경쓰지 않고 편하게 의사 노릇만 하려고 한다는 불만을 가졌던 것 같다. 학교 운영에 있어서도 선교비를 둘러싼 진통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교육 활동에 대한 마펫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선교부의 의도는 단순히 세상의 학문이나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제가 알기로는 영어를 가르치는 것을 찬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희가 양성하고 싶은 사람은 건정한 정신뿐만 아니라 건강한 신체를 갖춘 기독교인이며 노동의 존귀함에 대해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363)

선교 지역 할당도 중요한 사안이었다. 어떤 지역에 얼마나 인원이 필요한지, 어느 지역을 개척할 것인지, 그래서 어디서 인원을 빼서 어디로 보낼 것인지의 문제. 예산 문제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신이 속한 지역의 인원이 넉넉하다고 말할 선교사는 별로 없다. 저마다 인원 부족 타령을 하면서 증원 요청을 하기 마련이다. 미사여구로 가득 찬 선교사의 편지에서 실상을 정확히 가려내기란 꽤나 힘든 일이다. 본부에서는 보고서의 거품을 걷어내는 일이 필요했고,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마펫의 진술은 신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봉급이 남아돈다고 보고할 정도의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므로 예산 결정은 마펫의 조언을 참고로 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마펫의 선교 정책 중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교회 자립에 대한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네비우스 선교 방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한국 교회의 자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노력한다. 그의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는 1900년 10월 22일자 편지(607-618)에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스스로 전도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하며 스스로 치리하는 교회로의 성장을 목표로 삼고 장로를 선임하고 학생을 키우는 등 준비를 하고 있음을 밝힌다. 한국 교회의 자립은 한국인의 입장에서도 필요하지만 선교 확장이라는 선교사의 입장에서 보아도 필연적이라는 사실이 선교 진행 과정에서 나타난다.

③주요 사건들
선교편지에는 이 시기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언급이 많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사건으로는 해서교안에 대한 언급을 들 수 있다. 이 선교 편지들은 초기에 황해도 선교가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에 대해 계속 언급하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천주교와 개신교도들이 충돌하게 된 배경을 그려준다. 황해도 지역은 최초의 개신교회가 설립된 곳이기는 하지만 선교지부가 서울과 평양에만 설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 상주하는 선교가가 없었던 지역이었다. 원산과 의주, 부산에는 선교사가 입주하여도, 초기에는 해주, 개성에는 입주한 선교사가 없는 실정이었다. 이에 반해 가톨릭은 두 명의 신부를 이곳에 파송한다. 그래서 개신교의 입장에서 벌 때 천주교의 ‘산자 빼돌리기’가 문제의 발단이 된다. 다음과 같은 보고는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로마 가톨릭 신부들이 같은 지역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데 시골 사람들은 그 차이를 모르고 있습니다. 저희가 열심히 씨를 뿌려놓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는데 자칫하면 불란서 신부들이 그 열매를 수확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360)

천주교회는 그 지역(황해도)에 신부 두 사람을 파송하여 우리가 뿌린 씨앗으로부터 열매를 거두어들이고 있으며, 우리 신자들 중에서 불화를 조장하고, 우리 교인들을 괴롭히고 우리의 선교사역을 혼란시키며 그 효과를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487, 1898년 6월 27일)

개신교와 가톨릭의 충돌은 가톨릭의 일방적인 전횡 때문인 것으로 묘사된다. 충돌이 어느 정도 일단락 된 후에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보고된다.
천주교도들의 악행은 폭로되었고 모든 재판과 심리 과정에서 기독교인은 한 사람도 나쁜 일을 하지 않았음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래서 몇 달 전에 세력을 얻을 목적으로 혹은 관리들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천주교에 모여들던 것과 같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회로 모여들 것입니다. (903, 엘리스 마펫)


Ⅱ. 한국인의 신앙양태

①기독교의 문화적 충돌
<<선교편지>>에는 개신교 신앙 공통체가 형성되면서 조선 사회의 다른 영역과의 충돌이 일어나는 양상이 종종 보고된다. 대표적인 것이 평양의 지방 행정기구와 선교부의 갈등이었다. 당시 평양 감사는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기독교인을 압박하였고, 선교부는 공사관을 통해 중앙 정부에 항의함으로써 이에 대응하였다. 그러나 간혹 직접적인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웰즈라는 선교사의 다음 글에는 선교사가 지방에서의 권력 행사 방식의 일면이 나타나 있다.
여덟 명의 기독교인들이 최근에 포도대장에게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결과 두 명이 체포되고 한 명은 심하게 맞았습니다……. 포도대장은 그 사람들이 저지른 흉악한 범죄에 관해 제게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공과를 따지기를 거부하고 포도대장에게 그 사람들은 나의 친구들이며 나는 이때까지 한번도 입장이 거부된 것이 없었으며 단지 의사로 왔을 뿐이라고 말하고 만약 허락하지 않는다면 감사에게 고발하겠으며 감사가 거절한다면 서울에 전보를 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러면서 우리는 내내 즐겁게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상당한 인내를 발휘하면서, 공과를 따지기를 거부하고 기다리자 그는 마침내 승낙해 주었습니다……. 이제 그 사건을 마무리되었으며 시민의 자유는 백성들에 의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580, 웰즈)

문화적인 측면에서 개신교 신앙 공동체와 전통적 공동체 간의 충돌은 극심하였다. 전통 종교 가운데서도 무속과 기독교의 충돌이 가장 첨예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당이 개종했다는 것, 굿의 제구가 교회에 헌납되었다는 것은 기독교 승리를 극적으로 상징하는 것이었다. (무당들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사례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저는 어젯밤에 평양에서 열리는 한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한 무당이 마펫 선교사에게 무술 도구를 가져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 마을에서 악령 숭배를 그만둔 사람들의 숫자에 대해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347)
(어느 여신도가 전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무당들이 입던 옷과 놋쇠로 만든 조그마한 제구를 제게 건네주었습니다. 그것들은 어느 무당이 귀신들을 불러낼 때 사용하던 것들인데 이제는 그 일을 그만두고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게 된 후 내버린 것이었습니다. (533)

선교사의 문화적 판단이 한국 사회에 일으킨 파장은 매우 중요하게 고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금주, 금연의 문제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술이 반기독교적이라는 판단은 분명히 미국 사회의 맥락에서의 판단이다. 그 판단이 한국 사회에서 적용되었을 때의 충돌은 선교 초기부터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지속되는 문제로 남아있다. 선교사와 신자에게 술은 타락의 기호였던 반면에, 전통적 한국인에게 술은 공동체의 기호였다. 두 기호의 충돌이 다음 사례에서 나타난다. (난봉꾼의 개종이라는 이러한 사례는 이후 한국기독교사에서 매우 빈번하게 나타난다)
한 사람의 투쟁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여관 주인이며 상인인데 대단한 술고래인데다 도박꾼입니다……. 그는 과감하게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곧 이웃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온갖 희롱과 조롱과 욕설이 그에게 쏟아졌습니다……. 그의 과거 친구들이 함께 짜고서 그를 실족케 하려고 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그들이 다가와 그를 유혹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한국의 관습을 따라 같이 술을 마셔야 한다고 주장하며, 친구들에게 잘못하고 있다고 그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곤 했습니다. (239)

문화적 가치 판단의 문제로서 고려되어야 할 다음과 같은 사례도 있다.
오늘 불쌍한 한 젊은 과부와 그 친정어머니와 긴 시간 얘기를 나누었소. 두 사람 다 신자들이오. 그리고 스물세 살 먹은 이 청상과부를 유괴해 가려는 몇몇 못된 사람들의 계략이 꼭 수포로 돌아가도록 교회 성도들이 나서서 손을 쓰겠다고 이 두 모녀를 안심시켜 주었다오. 폭력으로 과부를 채가는 이곳의 풍습을 당신도 알지 않소. (784)
이 외에도 개신교 신자들은 신자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이 처음부터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774).

②크리스마스

초기 선교사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매우 중요한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신자들과 제대로 공유되지 못한 행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의 선교사가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서 서울로 내려온다든지(349), 본국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안식년 휴가를 맞춘다든지 하는 모습(412)에서 읽히는 것은, 선교사들이 크리스마스를 한국인들과 함께 해야할 종교 행사로 보기보다는 일종의 휴식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크리스마스가 지닌 가족 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음 역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그래함 리가 “저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한국인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서(500)”라고 말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크리스마스의 상징체계가 아직 한국인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으며 선교사 역시 그것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데 곤혹스러워한다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01년에는 크리스마스가 축제로 자리잡아가는 모습을 보이며 블레어 선교사가 산타클로스로 분장하였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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