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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발제

엘리아데의 꿈

by 방가房家 2023. 5. 16.

요즘 올리는 글들 대부분은 수업 시간에 제출하기 위해서 작성된 과제들을 손봐서 올리는 것들이다. 글 내용 딱딱하고 재미없을 수밖에 없고, 결정적으로 책 읽은 사람을 대상으로 쓰는 글이기 때문에 불친절하다. 약간 살을 붙여 올리긴 하지만 설익은 인용으로 이루어진 글이 잘 읽힐 거라는 기대는 않는다. 그래도 요즘 글 쓰는 것이 이런 것뿐이니, 다른 글 쓸 (시간은 있지만) 힘이 부족하니 학기중에는 어쩔 수가 없다. 안 올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혼자 생각하니까.
아래 글은 <<Changing Religious Worlds>> 후반부에 실린 빈, 알렌, 케이브, 페이든의 글에 대한 논평 과제인데, 글 읽으며 들었던 생각, 특히 엘리아데에 대한 나의 입장 정리가 글 내용과 섞여서 서술되었다. 매우 거칠긴 하지만, 나에게 엘리아데의 의미는 이러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엘리아데의 창조적 해석학은 종교학을 통한 구원론을 펼치려는 시도이다. 문화적 영적 재생을 의도하는 엘리아데의 꿈은, 알렌(Douglas Allen)이 거듭 이야기하듯이, 종교학을 넘어선 이야기이다. (알렌이 말하고자 한 바는 학제간 경계를 넘어선 기획이라는 뜻이지만) 그래서 나는 종교학자에게 엘리아데의 꿈은 학자 개인의 선택의 대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종교학자에게 엘리아데의 꿈이 강요되거나 학과 운영에 그의 꿈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엘리아데의 꿈을 공유하지 않는다. 나는 종교학을, 빈(Wendell Charles Beane)이 이야기하는 “기초적인, 근본적인, 밑에 깔린 진실”(189)을,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지혜”(189)를 발견하는 철학으로 격상시키는 일에 반대한다. 서구인의 문화적 위기를 구원하는 역할도 부인한다. 그런 꿈을 계승하는 사람들은 뉴에이지 하는 사람들이나, 우리나라 경우엔 정신문화사와 류시화같은 부류이다. 나는 그런 꿈에 관심이 없다. 그것은 머피(Tim Murphy)가 정확히 지적한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 꿈은 서구인들이 꾸는 꿈이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인 “그들”의 정신적 위기를, 그들이 타자로 대면하는 “내”가 속한 비서구인들이 해결할 방책을 제시해준다는 이야기에 선뜻 찬성하기가 힘든 것은 차치하더라도, 일단 “우리”가 새로이 구성되지 않고서는 그 꿈을 공유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여유로운 나라 미국에서 “빨리 빨리”를 외치고 다니며 그 사람들의 정신적 평화를 깨고 다니는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다. 이 비서구인들은 현대인일까? 타락한 고대인일까? 답이 어찌되었건, 그들이 어찌해서 이리 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이 내 우선적인 관심사이기에 엘리아데의 꿈을 공유할 여력이 없다.
엘리아데의 시대의 종언, 포스트-엘리아데의 종교학을, 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한다. 더 이상 엘리아데의 꿈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 꿈을 함께하지 않는 것과 선행 연구로서 그의 작업을 계승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아데를 믿지 않는 자는 그를 사용할 수 없다. 그들에게 엘리아데는 무의미하고 견해 없이 남아있을 뿐이다.”(279)라고 말한 레니(Bryan Rennie)는 틀렸다. 엘리아데를 “다른 분야의 저명한 학자처럼”(189) 대가로 무작정 대우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그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한다. 윤이흠 선생님이 항상 하시던 말씀이 있다. 엘리아데는 종교 현상의 아름다운 측면을 이야기한다고. 엘리아데는 거기까지이다.

엘리아데가 던져준 주제들을 어떻게 연구하느냐의 문제는, 성스러운 공간을 분석하는 작업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케이브(David Cave)는 이야기한다. 엘리아데의 성스러운 공간은 성스러움을 드러낸다는 실존적 측면과, 그것이 경험하는 사람에 의해 구성되는 측면 둘 다를 지닌다고. 후자의 측면에 주목해서 성스러운 공간에 대한 분석 작업에 들어갈 수 있다고. 그런데 공교롭게 이 후자의 측면은 뒤르켐의 의해 제시된 부분이다. 그래서 케이브의 학생들은 “모종의 힘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으로서 성스러운 공간을 인식하게 될 때는 엘리아데의 편을 들고, 어떻게 성스러운 공간이 작용하고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가를 묘사하게 될 때는 뒤르켐의 편을 들었다.”(248)
[공간 연구에 있어서 이러한 점, 즉 공간 상징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 엘리아데와, 거기서 더 나아가 사회적인 의미를 이야기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할 것: 중심의 상징, 그리고 권력]

뒤르켐적 시각의 중요성은 페이든의 글에서 더 분명하다. 그는 조나단 스미스가 정리한 바("Wobbling Pivot")를 따라 엘리아데의 성스러움에 현상학 계열의 측면과 프랑스 사회학파 계열의 측면으로 나누고, 후자, 즉 페이든의 표현으로 다원주의 엘리아데(Eliade-the-pluralist, 조나단 스미스의 표현으로는 분류체계의 관점)가 자신의 비교연구의 자산이 된다고 밝힌다. 엘리아데를 잘 읽어보면 인간이 성현의 수동적 대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스러움을 구성하는 측면이 존재하며, 그 지점이 현대 이론에 생산성을 부여한다는 이야기이다. 엘리아데에서 쓸모 있는 부분은 그가 뒤르켐에서 받아들인 부분이다.(그런데 엘리아데는 그 영향 관계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환원주의를 공격했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았다.) 여기서 한가지 역설적인 상황을 만나게 된다: 포스트-엘리아데 종교학은 뒤르켐의 재발견에 바탕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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