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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메모

신화, 집단적 창작물

by 방가房家 2023. 5. 16.
지난번 글의 연장선상에서 혼합현상에 대한 설명에는 창조적 개인과 비창조적인 대중의 구분이 남아있고, 이를 넘어서 대중의 창조성을 어떻게 설명할까 하는 여러 생각을 해보는 중인데, <<A Magic Still Dwells>>에 실린 웬디 도니거의 논문 "Post-modernism and -colonial -structural Comparison"에 눈길이 가는 부분이 있어 옮겨놓는다.

가고일님이 지적한 개미떼가 모여 하나의 ‘초지성’을 만들어 다른 상대와 대화를 한다는 이야기도 귀에 들어오고, 대세 놀이니 드라군 놀이니 하면서 인터넷 공간에서 성원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해 개인적 차원과는 다른 집단적인 결과물이 생성되는 과정에도 관심을 갖는 중인데, 웬디 도니거는 “신화는 집단적 창작”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상기시켜주면서 이 문제에 대해 값진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집단 창작인 현대 대중문화가 신화 연구의 대상으로 연결성을 지닌다는 지적을 해준다:

“대중 문화의 몇 작품들은 개인 저자에 대해 모른다는 점과 그래서 신화학자 캠프에 들어온다는 점에서 많은 신화들과 공통된다. 예를 들어 영화는 흔히 집단에 의해 창작된다.”(70)
 
이러한 연결성에 포스트모던의 시각이 도움을 준다는 점도 지적한다:
 
“의심의 해석학은 개인 저자의 의도의 문제를 중요치 않은 것으로 만들어 위대한 문학 작품을 신화학자를 위한 공정한 게임으로 만들어준다.”(70)
 

도니거는 집단을 ‘같음’으로 동질화시키는 시각도, 그렇다고 집단을 ‘다름’으로 파편화시키지도 않는 설명틀을 고민한다. 우리가 새로이 상정해야하는 것은 무비판적인 같음이 아니라 “피상적으로는 유사 융(Jung)식 보편주의와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개인 저자들의 개인적 점들로부터 구성된 점묘(點描)에 기초한 ‘같음’(sameness)”(70)이다. 여기서 그녀는 개인을 소거시키지 않으면서도 전체의 그림을 그려내는 방법을 점묘법(pointillism)으로 제안한다. (점묘법에 대한 이야기는 <<Implied Spider>>3장에도 나오는데, 이 논문에서 그보다 약간(아주 조금) 구체적으로 나온다. 여기서도 그리 자세히 그려지지는 않는다.) 점묘법은 행위 주체라는 이론적 난점을 극복하게 해준다:
 
“‘아래에서 위로’를 주장하며 진짜 사람들을 강조하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 초문화적인 일치의 근원으로서 초월적 행위 주체(agent)를 상정할 때의 문제들을 없애준다.”(71)
 
흥미로운 것은, 도니거 제안이 집단적 창조의 과정을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인정하는 점이다. 슬프지만, 나도 이론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가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에 도니거의 말에 동의한다.
 
점묘법에서의 “한 개인에 대한 강조는 독창성을 설명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영감의 순간을 포착하게는 해준다.”(72)
 
 
마지막으로 도니거의 멋진 말.
 
우리 개인 예술가들을 서양 정경(正經)의 요새 안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무시되었던 구전의 샛길들이나 버려졌던 이단들에서 찾는 것, 줄루족의 톨스토이들, 파푸아 뉴기니의 프로스트들, 그리고 그라피토와 B급 영화의 예술가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좁은 범위의 문화적 탁월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어느 문화에서나 발견되는 영감의 넓은 구성물을 주장하는 것이다. (72)
 
“줄루족의 톨스토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이 말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저명한 소설가 솔 벨로우(Saul Bellow)가 했다고 알려진 말이다. 어느 자리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벨로우는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줄루족이 톨스토이를 배출할 때가 되면 우리가 기꺼이 읽어주지.”(When the Zulus produce a Tolstoy we will read them.) 타문화에 대한 무시와 유럽인의 오만함이 배인 이 말은 금방 유명해져서 많이 인용되었다. 나중에 벨로우는 이 말을 한 기억이 없다고 부인했다고 하는데, 그 사실 여부(누가 알겠어?)와는 상관없이 생각할거리가 많은 표현이다. 노벨문학상 한국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간단히 말해주면 이렇다. 한국에 아직 ‘톨스토이’가 없어서 그렇다고.
 
도니거는 줄주족의 톨스토이 표현이 “누가 작가와 작품이 ‘좋은 지’를 결정하느냐, 그리고 어떤 근거에서 그러하냐”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위 인용문에서 그 표현을 역으로 사용한다. “톨스토이”이라는 말을 통해 다른 문화, 그리고 대중문화에 서구 고급문화의 잣대로는 발견되지 않는 천재적 개인들이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그들의 창작의 결과들이 축적되어 대중문화가, 신화가 (그리고 내 경우엔 혼합현상이) 생성되는 것이다. 그 모습에 대한 전체 그림은 천재적 개인들이라는 점들을 지워버리지 않으면서 그려져야 한다. 그래서 도니거는 점묘법을 이야기한다.
 

이 글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권력의 문제에만 천착하는 한, 그것은 자니의 한 음이 될 것이다”(it is a Johnny one-note)라는 문장이 나온다. 찾아보니 "Johnny One Note"라는 오래된 미국 노래가 있다. 자니는 한 음으로밖에 노래를 못해요...라고 시작되는 노래로 한 음밖에 모르는 꽉 막힌 사람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도니거 할머니 덕분에 노래 하나 배웠다. 가사는 아래와 같다.
 
(이 할머니 책 읽다보면 구글링이 필요할 때가 많다. 어제는 이런 문장이 나왔다. “신화는 장티푸스 메리(Typhoid Mary)와 같아서 받는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이미지와 주제들을 통해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기억을 전달한다.” Typhoid Mary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조하시길. 대단한 여자다.)
 
Shirley Bassey - Johnny one note
 
Johnny could only sing one note
And the note he sang was this: aaaahh

Poor Johnny One Note
Sang out with Gusto
And just overloaded the place

Poor Johnny One Note
Yelled willy-nilly
Until he was blue in the face

For holding one note was his ace
Couldn't hear the brass
Couldn't hear the drum

He was in a class
By himself, by gum

Poor Johnny One Note
Got in Aida indeed a great chance to be brave

He took his one note
Howled like the North Wind
Brought forth wind that made critics rave

While Verdi turned round in his grave
Couldn't hear the flute
Or the big trombone

Everyone was mute
Johnny stood alone

Cats and dogs stopped yapping
Lions in the zoo
Were all jealous of Johnny's big thrill

Thunderclaps stopped clapping
Traffic ceased its roar
And they tell us Niagara stood still

He stopped the train whistles

Boat whistles
Steam whistles
Cop whistles

All whistles bowed to his skill
Sing Johnny One Note
Sing out with gusto
And just overwhelm all the crowd
Aaah
So sing, Johnny One Note out loud
Sing, Johnny One Note
Sing - Johnny - One Note - Out 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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