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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현상에서 행위 주체(agent)의 문제

by 방가房家 2023. 5. 16.

탈랄 아사드의 <<세속의 형성>>(Formation of the Secular) 2장에서는 “agent” 개념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고, 개념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agent”, 어려운 개념이다. 영어 사전이 해석에 도움이 안 되는 단어인데, 나는 사회학 공부하시는 분들을 따라 ‘행위 주체’로 옮긴다. (그렇다면 'agency'는 'agent'가 하는 짓이므로 ‘행위’가 된다.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의미상 그러하다.) 종교학에서 행위 주체 개념이 왜 중요한가를 생각하다가, 최근 몇 년간 내가 물음으로 품고 지냈던 문제를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석사논문에서, 한국 개신교 의례 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혼합현상(syncretism)은 개신교 대중 전통(popular tradition)의 창조성을 보여준다는 요지의 발표를 했다. 그 때 정진홍 선생님이 하신 질문이 대충 이러했다. 엘리트 전통이 아니라 대중 전통에서 창조성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잘 이해가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 질문은 대중 전통을 무시해서 하는 질문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창조성은 개인이 의도성을 갖고 한 행위에 적용되는 말이기 때문에 집단이 창조성을 갖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를 질문하신 것이었다. 창조성, 엘리트 전통에 적용하기는 쉬워도 대중 전통에 대해서는 그 주체가 누구인지의 물음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 질문에 나는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대중 전통의 창조성이라는 내 주장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고, 그 문제는 논문이 나오고 나서도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혼합현상을 설명하는 학자들은 이 문제를 의식적인 혼합현상(conscious syncretism)과 무의식적인 혼합현상(unconscious syncretism)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엘리트 전통의 지적인 혼합현상이 있는 반면에, 대중 전통의 드러나지 않는(implicit), 자발적인(spontaneous), 무반성적인(unreflective) 혼합현상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A. Drooger, "Syncretism: The Problem of Definition, the Definition of the Problem", in Jerald Gort, et al., eds., <<Dialogue and Syncretism: An Interdisciplinary Approach>>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9), 22.]
혼합현상을 주체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수긍할 수 있으며, 그 중 엘리트의 혼합현상의 창조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다. 종교적 천재들이 여러 전통들을 그러모아 만드는 신종교들에서 그런 예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고 있는 선교 과정에서 일어나는 혼합에서는 그런 쉬운 구분이 문제가 된다. 그러한 혼합은 대중들이 “생각 없이”, 무비판적으로,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일이라는 설명은, 기존 종교 지도자들의 입장(무지에서 온 혼선이라는, ‘혼합주의’에 대한 경멸)을 반복하는 것 같아 속이 불편하다.
그런 구도라면 대중 전통은 의도를 지니지 않기 때문에 창조성을 가진다는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워진다. 대중 전통과 창조성의 관계의 문제, 이 때문에 혼합현상을 서술하는데 행위 주체(agent)의 문제가 핵심적인 것이 된다. [Charles Stewart & Rosalind Shaw, eds., <<Syncretism/Anti-Syncretism>> (New York: Routledege, 1994), 16-22.] 아사드가 인용한 인류학 교과서에는 그러한 역설이 보인다: “이론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문화적이면서도 역사적으로 구성된 주체가 필요하다. 그러나 정치적인 관점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자율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주체를 원하게 된다.”(72)
아사드는 ‘의도’와 ‘주체’가 이론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상정되어 왔다고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도는 계획, 인지, 의지, 직접성, 욕망 등으로 다양하게 설명되면서 흔히 행위 주체의 속성에 중심적인 것으로 된다.”(79) 나는 의도에 결합되는 아이템의 목록에 창조성을 추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애리조나 주립대에는 혼합현상 분야의 고수, 알렉산더 헨(Alexander Henn) 교수가 있다. 그 분 수업 시간에 내가 한국 개신교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 나왔다. 선교 상황에서 대중적으로 일어난 종교적 변화, 그것이 의도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이 힘든 현상. 비겁하지만, 나는 몇 년 전에 내가 받은 것과 거의 동일한 질문을 헨 교수에게 했다. 그것이 의도적인 혼합이었는지 무의식적인 혼합이었는지, 그 주체를 어떻게 상정해야 하는지. 그 질문에 대한 헨 교수의 대답은 머리가 버쩍 깨이게 하는 것이었다. 헨 교수 자신은 혼합현상을 설명할 때 의도와 비의도를 나누는 접근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의도/비의도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행위 주체에 대한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자기는 요즘 이론가(하버마스를 이야기했던 듯 싶다)의 대안적인 이론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소개해 주었다. 헨 교수가 완전한 이론 정답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심지어는 그가 대안적으로 제시해 준 이론까지도 까먹었지만(애고, 내 머리야... 그나마 변명을 하자면 내가 그 이론이 참고할 가치는 있지만 답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메모를 잃어버리면서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가 의도/비의도의 구분이 중요치 않다고 한 순간, 나는 ‘자율적 주체’라는 잘못된 가정을 갖고 있었다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풀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잘못 제기된 문제라는 것. 그래서 고수와의 만남은 소중하다.
 
아사드는 여기서 지적하는 부분은 그 때의 깨달음과 연결된다. 우리가 어느 종교 현상의 변화를 두고서 그것이 의도적이었는지 비의도적이인 것인지를 묻는 것은 “빅토리아 이론가로부터 지금까지 상정되어온 ‘자율적 주체’(free agent)”(95)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자율적 주체의 가정에서 벗어나 주체에 대한 가정을 재설정할 때만, 변화가 의도적인지 비의도적인지를 묻는 잘못 설정된 문제에서 벗어나게 되고 대중 전통은 비의도적이기에 창조적일 수 없다는 명제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의도를 행위주체 외적인 것으로 놓는 것을 부정하는 아사드의 작업은 의미가 있다. 의도와 통합된 행위주체의 설정, 그것을 위해 아사드는 아비투스 이론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논의는 충분히 전개되지 못했다. 아비투스 개념에 대한 정교한 논의도 없이 그냥 말에 의존해 대충 이야기하고 넘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이 나중에 눈 찌르고 방랑을 떠난 행동에 대해, 그것이 흔히 말하듯 도덕적 책임감의 발로가 아니라 “오이디푸스는 자기 권력부여(self-empowerment)에 대한 지향 없이 창조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98)는 식으로 알듯 말듯 이야기해 버린다. 그러나 아사드의 논의가 이후에 어디로 날아갔든 간에, 그가 제기했던 행위 주체에 대한 문제의 방향성은 나의 이론 설정 작업에 충분한 암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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