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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발제

성경 변개에 관한 책

by 방가房家 2023. 5. 16.
 
바트 어만의 <Misquoting Jesus>가 번역되어 서점에 나와있는 것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이 책이 미국에 나온 것은 2005년 말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2006년 5월에 우리말 책이 나왔다. 학술서적에서는 보기 힘든 속도이다. 그렇다고 책이 어설픈 것도 아니다. 좋은 책이 선택되었고, 번역이 썩 잘 되었다. 전문성 면에서나 수월하게 읽히는 면에서나 탁월하다.

딱딱하게 말하자면, 이 책은 성서 본문비평을 일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책이다. 본문비평은 모든 비평의 기본이 되는 작업이지만 다소 지루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수많은 사본들을 대조해보면서 다른 부분을 찾아내고 비교하는 작업은, 난해한 그리스 본문들을 베끼다가 꾸벅꾸벅 졸아 실수를 하는 필사가들의 모습만큼이나 고달파 보인다. 그렇게 찾아낸 수만개의 이문(異文)들의 대부분은 오기, 문법적 실수, 줄 바꿔쓰기, 빠트리기, 엉뚱한 단어의 추가 등, 사소한 것들이다. 그중 아주 일부만이 성서에 대한 이해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래서, 매우 중요한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를 일반 독자에게 매력적으로 소개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했다. 저자 자신이 책을 시작하면서 밝힌대로, 실제로 이 분야를 알기 쉽게 소개한 책 자체가 지금까지 없었다. 어만이 정말 평생 욕심을 내어볼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어만은 대단히 부지런한 학자이다. 일년이 멀다하고 책을 낸다. 이 사람은 신약성서에 대한 교재 <The New Testament>를 쓴 사람인데, 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 책이 벌써 4판인가 5판까지 개정판이 나왔다. 그의 책이 해리스의 책과 더불어 미국 대학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교재임을 감안해 본다면, 책 무지 많이 팔았을 것이다. 개정판이 나오면 학생들은 미국 대학가에서 일반화되어있는 중고 서적을 구입하지 못하고 새 책을 사야하기 때문에 출판사나 그나 떼돈을 벌었으리라 생각된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교재에 대한 요약판, <A Brief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라는 책도 썼다. 또, 그는 신약성서 내에 포함되지 못한, 이른바 ‘정통’ 기독교에서 배제된 영지주의를 비롯한 초기 기독교 시대의 다양한 의견이 담긴 텍스트들을 소개하는 <Lost Christianities>라는 책과 관련된 자료집들도 내었다. 신약성서 과목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이겠지만, 그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보아야 하는 책이다. (나는 다른 책들보다도 그의 <The New Testament>와 <Lost Christianities>가 우리나라에 꼭 소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뿐인가, <다빈치 코드>에 대한 사회적 관심에 발맞추어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책을 썼으며 이번에 <Misquoting Jesus>를 썼다.
이러한 출판 경력으로 보면, 그는 돈버는 재주있고 유행에 민감한 글쟁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아마 이 책을 출판한 한국 출판사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쩐에 밝다고 해서 그를 만만한 학자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의 책들은 성서학의 수준 높은 최신 논의들을 다 담고 있다. 그는 부지런히 사회적 수요에 맞추어 학자로서 필요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만만치 않은 내용을 쉽게 풀어쓰는 능력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본문비평이라는 분야를 매력적으로 풀어낸 이 책에서 그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성경 왜곡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바트 어만이 한국말을 알았다면 이 제목에 화를 냈을 것이다. 내 생각엔, 번역자도 이 제목을 상당히 싫어했을 것 같다. 제목을 정한 것은 출판사였을 것이며, <다빈치 코드>에 의한 독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관심(또, 반기독교적 관심)을 노렸을 것이다. 저자가 <다빈치 코드>에 대한 책도 쓴 적이 있겠다, <예수는 신화다>같은 식으로 꽤 팔릴수 있겠다 생각했나 보다. 이 책이 그리 신속하게 번역되고 출판된 것에는 영화 개봉 시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만에, 이 책은 무얼 폭로하고자하는 책들과는 급이 다른, 엄연히 학술적인 책이다.

이 책을 구입하면 표지 위에 “<다빈치코드>가 왜곡한 성경의 진실은 무엇인가?”라고 쓰인 껍데기가 붙어있다. 받자마자 이 얼토당토 않은 광고 문안을 떼 버렸다. <다빈치코드>와 무관함은 말할 필요도 없고, 문제의 명사 ‘왜곡’은 무지하게 가치평가적인 단어이다. 무언가 바른 것을 전제하고, 그것을 잘못된 방향으로 훼손시킴을 일컫는 말이다. 물론 이 책은 본문비평에서 쟁점이 되는 본문의 변개(變改)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이 변개가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 아니어서 와닿는 표현을 골랐다고 변명할 것이다. 사실 영어 제목에 나오는 'misquoting' 역시 변개를 나름대로 섹시하게 바꾼 표현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필사를 인용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신약성서가 예수를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기록한 책들의 집합이며 필사자들의 다양한 사본들 역시 나름의 이해에 기반한 산물이라는 의미있는 생각이 담겨 있다. 왜곡과 'misquoting'의 간극은 너무 크다.
책을 읽으면, 저자의 주제의식이 ‘왜곡’의 반대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단 왜곡이 상정하는 바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성경의 원본문이 주어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왜곡의 나쁜 의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책에서 다루는 것은 전승 과정에서 생기는 텍스트의 변화인데, 저자는 그 변화가 나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변화가 의식적인 경우도, 무의식적인 경우도 있지만 그것을 분간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때로는 무의미하며), 필사자들은 성경을 보존하려고 최대한 노력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듯이, 필자는 본문의 변개는 필사자들의 성경 이해와 관련된 문제이고 성경에 대한 독자의 독해가 다양한 만큼 그 이해 역시 다양하다는 입장을 밝힌다. 성서 본문이 변개되는 사실은 ‘나쁜 것’이 아니라 인류 문화사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왜곡? 책 내용에 대한 왜곡에 다름아니다.

제목에 혹해 책을 집어든 독자들은 차분하게 성서 형성과 전승 과정을 설명하는 책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 본문 자체가 정확하게 확정될 수 없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신자들에게는 어마어마할 수 있다. 저자 자신의 경험을 담담히 서술한 책의 서문이 좋은 예이다. 저자는 원래 성서무오설에 입각한 신앙을 갖고 있었는데, 성경 본문에 대한 공부를 해나가며 그것이 완전히 바뀐 것을 재미있게 이야기해준다. 꼴보수 학교인 무디성서학원에서 보수 학교인 휘튼 대학으로, 또 거기서 약한 보수 학교인 프린스턴으로 옮긴 이력도 참 흥미롭다. 확정된 본문이 없는데 성경의 한글자 한글자가 무오류하다는 것은 뿌리가 없는 주장일 수밖에 없다. <도덕경>에 대한 문자주의적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에게 도(道)와 덕(德)의 경이 뒤바뀐 마왕퇴본(本)의 발견은 하늘이 뒤집어지는 일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이 동아시아 고전을 공부하는 분들에게 참 유익할 거라고 생각한다. 서구 학계는 성서 본문비평에 대한 오랜 연구의 역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방법론에서 참고할 것들이 있을 것이다. 동양 고전의 문헌 비평의 필요와 실례들에 대해서는 도올의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가 우리나라 학계에서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공격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알린 것은 사실 아니겠는가.)
책 후반부에는 본문비평의 실례들을 보여주는데, 이게 그냥 예들이 아니다. 성서 이해에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 이문들이다. 마가 부분의 뒷부분이나 요한복음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가 본문 비평의 관점에서 훗날 덧붙여진 것이라는 사실은 일반 독자들에게 충격적인 내용일 것이다. 요한일서 5장에 나오는 ‘요한의 콤마’라는 삽입절은 킹 제임스 성경 주장하는 사람들이 맨날 우기는 내용인데, 그것이 잘못된 본문을 사용해서 벌어진 일임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여성에 대한 바울의 언급들이 후대의 남성우월론적 시각에 의해 첨가되었다는 것, 반유대주의적인 변개 등. 하나하나 허투루 지나칠 예들이 없다.

특히 저자는 복음서 저자들의 관점 차이가 후대 필사자들의 이해에 의해 변개된 것을 자세히 해설해주는데, 이 대목에서 성경의 본문 구성이 단지 사본들을 비교하는 작업이 아니라 원저자들의 신학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본문비평은 다른 비평들과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성경 책들은 관점이 다양한 필자들에 의해 서술되었으며, 필자들의 신학의 차이에 유의해야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는 대목으로 넘어가게 된다. 특히 네 복음서 저자들의 신학적 차이는 크며 네 복음서는 단순히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네 다른 신학적 진술임에 유의해야 복음서를 이해할 수 있다는 데까지 지적한다. 이 역시 한국 독자들에게 익숙한 내용이 아니며 때론 불편할 수도 있다. 신약 각각의 책들에 다른 목소리가 있음을 알리는 것이 책의 주목적은 아니지만, 저자는 요령있게 본문 원문 재구성 과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 점까지 잘 인지시킨다.

몇 년 전 교계를 약간 시끄럽게 한 <예수는 없다>에서는 이런 성서학의 성과들이 맛봬기로 간혹 언급이 된다. 하지만 이 책은 비교할수도 없이 본격적으로, 그리고 학문의 중심부에서 중요한 사실들을 말하고 있다. 한기총은 뭐하고 있단 말인가? 그들이 한글자 한글자 무오류하다는 그 성경의 확정된 본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야말로 문자주의 신앙에 대한 A급 태풍이다. <예수는 신화다>와 같은 그저그런 책이나, <다빈치 코드>와 같은 나부랭이 영화에나 화낼 일이 아니다. 이 책이야 말로 금서로 정해야 마땅한 책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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