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의 금주문화의 형성과정을 다룬 최근 논문을 한 편 읽었다. “초기 한국기독교의 금주금연 문제”(2010년)이라는 글. 관심 갖고 있는 주제를 정리한 글이라 고마워하며 읽었다. 마침 잘 아는 분이 쓴 글이라 부담 없이 배운 점과 아쉬운 점을 정리해본다.
문제제기부터가 마음에 든다. “초기 기독교인의 생활 속에 금주․금연이 녹아드는 과정과 끼친 영향력에 주목”(6)한다고 하였다. 그것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와는 별개로, 연구 방향에는 기존의 것들과 다른 신선함이 있다.
1.
금주문제는 선교사에 대한 언급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술을 금지했나? 논문은 아서 브라운의 유명한 언급을 인용한다.
한국에 들어간 선교사들이 지닌 공통성은 청교도형이었다. 그들은 백 년 전에 뉴잉글랜드의 우리 조상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안식일을 지켰다. 그들은 춤추고, 담배 피우고, 노름하는 것을 죄로 보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는 하지 못할 일이라 하였다.(8-9)
초기 선교사들이 청교도적이었다는 것은, 기독교사학계가 갖고 있는 ‘신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청교도가 존재하지 않던 19세기말에 사용된 이 명칭은 기독교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신화적 조상을 일컫는 비유적 표현이지 학술적인 용어로 사용될 수는 없다. 이 문제는 다른 논문을 통해 다시 정리할 생각이다.
선교사들이 청교도적이어서 금주를 했다는 것은 단순한 설명이다. 나는 이 부분이 미국 당시의 맥락을 고려해서 정교하게 설명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내가 공부해야 할 부분이다.
2.
선교사들이 금주를 위해 어떤 조치를 했는가? 논문은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한다.
1903년 조선감리회 연회에서 벙커(Dalziel A. Bunker)가 제출한 <절제와 사회개혁 >(Temperance and Social Reform)이라는 보고서:
주일성수, 술의 사용, 결혼, 도박과 노름, 담배와 궐련의 사용, 노예 소유 등 6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이 규칙에서 술, 담배, 도박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신자는 술과 담배를 먹어서도 안 되고, 제조나 판매도 금지되었다.“존졀공과,” <신학월보> 1권 9호(1901년 8월).
“슐은 속이 물건이니 과음면 발광니 술에 침윤야 속 이 심히 지혜업니라”이라 하여 술을 다툼, 원망, 병, 색욕, 어지러움, 몸 상함, 술에 종노릇하는 7가지 고난을 가져오는 죄악으로 여겼다.(아래아 표기가 깨짐)
3.
금주에 관련된 초기 자료 중 강경한 내용 때문에 눈에 띄는 것이 ‘계주론’이라는 글이다.
“계주론,” <죠션크리스도인회보> 1897년 9월 8일.
만일 종내 회개치 못하고 술만 먹다가 죽으면 영혼이 지옥으로 갈 터이니 이것이 참 무서운 일이라 또 술먹는 데 죄 되는 걸로 말하면 취토록 먹어 죄 되는 아니라 한 모금만 마셔도 죄 되나니 그 먹음으로 죄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죄 되느니라.
금주 문제에서 해명되어야 할 것이 왜 그것이 죄악이 되었느냐는 것이다. 원래 금주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가 아니었다. 성경에서도 금한 바가 없다. ‘술을 지나치게 먹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과 ‘술 먹으면 지옥 간다’는 것은 엄청난 비약이다. 금주가 한국인이 이해한 개신교의 핵심적인 교리 속에 들어온 과정이 해명될 필요가 있다. 기존 연구들은 비약에 대해 침묵하고 있으며 아쉽게도 이 논문도 그러하다. 오히려 말을 돌려 선교사와 목사들이 주장한 금주의 논리적 근거를 정리한다.(3절, 논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 그러나 그러한 명목상의 논리와 실제 신앙생활의 간극을 인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음주와 흡연이 범죄행위가 되기는 하였으나 구원불가의 원인으로 지목되지는 않았다. 음주와 흡연이 거룩한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인식되기는 하였지만, 음주흡연하면 절대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극단적인 논리가 계속 발전하지는 않았다.(13)
4.
나에게 중요한 부분은 실제 신앙생활을 보여주는 4절이다. 새문안 교회 초지 자료들(<새문안교우문답책> <새문안교회당회록(1910~1914)>)을 사용해 술에 관련된 치리가 엄격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내용이 흥미로웠다. 자료에 대해서도 배웠다.
새문안교회 초기 세례문답에서:
“주일 안지키고 술 먹는 거시오”, “아직 회개치 아니하고 술장사하는 거시오” 등이 탈락의 이유였다.(20-21)
5.
결론 부분에 나오는 정리는 나로서는 불만족스럽다. 금주가 사회적 운동으로 ‘발전’했다는 게 이야기의 끝일까? 금주의 문제는 여전히 개신교인 개개인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율법이다. 이러한 행위체계의 존속이 더 무거운 문제가 아닐까? 이 부분에서는 기독교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학파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당초 교회의 순결, 신자의 성결의 증거로서 강조된 금주금연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내면화되어 기독교인으로서의 구별된 삶의 표시로써 뿐만 아니라 사회를 정화하고 개조시키는 절제운동으로 발전되었다.(24)
그러나 이 논문은 결론에서 정리되지 않은 더 중요한 문제들과 자료들을 제시한다. 그 부분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