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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발제

신정론에 관한 노트

by 방가房家 2023. 5. 11.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라는 개념을 소개하기 위해서 다음 글을 읽고 설명하는 기회가 있었다.
장석만, “착한 사람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하나”, <<종교 읽기의 자유>>, 294-303.
요약하면서 살을 약간 붙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하면, 신정론은 다음 조건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을 때 생기는 문제이다.(302) 준이 엄마의 대사(밀양)에 함축된 내용이다. “만일 하느님이 계시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그렇게 크시다면, 왜 우리 준이를 그렇게 내버려 두셨나요?”

1) 신은 전지전능하다.
기독교는 완전한 능력을 가진 신에 대한 믿음이다. 만일 신의 능력이 부실해서 악의 발생을 어쩌지 못하는 경우에는 어떨까? 조로아스터교, 마니교가 그런 경우다. 그 전통에서는 세상이 선신과 악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하기 때문에 인간이 겪는 고통은 선신이 어지할 수 없는, 악신의 행위의 결과로 설명된다. 그런 경우 신정론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2) 신은 정의롭다(완전 선하다).
신이 정의로운 존재가 아니라 변덕스러운 존재라면 어떨까? 그리스 신화의 신들처럼 변덕에 의해 세상의 분란이 일어나는 일이 잦다면 신정론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3) 고통은 실제로 존재한다.
이 세상의 고통이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면 신정론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cf. 불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발한 종교이다. 그러나 불교의 세계에서 신은 핵심적인 존재가 아니다. 고통은 전생의 행위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설명되며, 궁극적으로 수행을 통해 현세의 고통을 벗어버리고 해탈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이다. 불교는 고통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지만 신과의 문제로 다루지는 않는다.

결론은 싱겁지만 중요하다. 전능한 신을 전제로 하는 전통에서만 생기는 모순이라는 것이다.

“신정론은 보편적인 설명이 아니라 유일신적 종교를 배경으로 하는 독특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신에 대한 사색이다.”(303)

어찌되었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독교 전통에서 제시해 온 논리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
악은 논리적인 필연이라는 지적인 설명이다. 이것은 굉장히 쿨한 사람들이나 받아들일 수 있는 설명일 것이다. 어떤 일의 존재 이유를 설명한다고 해서, 왜 그것이 하필 나에게 닥쳤느냐는 실존적인 질문에는 답할 수 없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2.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
쉽게 말하면 인간 탓에 그런 일을 겪는다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설명이지만 문제도 크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설명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도대체 내가(혹은 그가) 무슨 대단한 잘못을 저질렀길래 이런 험한 꼴을 당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자유의지와 엄밀하게 같은 뜻은 아니지만, 세상일을 인과응보의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더 강하다고 생각되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친숙한 업보業報라는 불교 개념과 결합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독교인들도 가끔 전생을 언급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본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당사자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되는 경우가 많다.


3. 더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해
하느님이 나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 일부러 시련을 주신 것이라는 견해이다. 상당히 성숙한 경지의 신앙에서 볼 수 있는 태도로, 밀양에서는 신애가 기독교를 완전히 받아들였을 때 자신의 고통을 하느님을 만나게 해준 계기로 해석하지 않았을까 싶다. 고통에 대한 의미부여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때로 이런 의미부여가 완전히 깨져서 파멸되는 이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인격수양으로 감내할 수 있는 한계치가 있기 마련이다.


4. 마지막에 알 수 있다
이것은 아래 견해와 유사하지만 종말론적인 면을 강조하는 견해이다.


5.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신은 역사하고 계시지만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것. 불가지론과 비슷해 보이지만 회의론이 아니라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 욥이 하느님과 조우하면서 얻은 해답이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유대인들이 나치에 의해 학살되던 시기는 특히나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많이 제기되던 때였다. 그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앙을 지킨 유대인들이라면 신의 침묵에 한없이 야속해하면서도 그래도 자신이 알 수 없는 섭리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6. 고통은 신과 만나는 자리
이것은 감동적인 만남이다. 소설 <침묵>에는 일본에서 극한의 고통을 받던 로드리고 신부가 신의 침묵에 더 괴로워하다가, 성화를 밟고 배교하는 장면이 있다. 그 순간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밝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라는 신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러나 이런 역설적 만남은 감동적이긴 해도 일반화시키기는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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