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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발제

샘 길, <이야기 따라가기>, 1장

by 방가房家 2023. 5. 10.

북미원주민 연구가 샘 길의 <<이야기 따라가기Storytracking>>의 1장 내용. 조너선 스미스의 <<자리잡기To Take Place>> 1장을 읽다가 찾아 읽게 된 글. 이 글은 스미스가 지적한 엘리아데의 오스트레일리아 자료 사용 문제를 샘 길이 더 철저하게 찾아들어간 내용이다. 원주민의 자료로부터 학자의 이론에 이르기까지의 굴절의 과정을 되짚는 ‘이야기 따라가기’는 공부하는 이들에게 교훈을 주는 작업이다.

Sam D. Gill, <<Storytracking>>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ch. 1.

1장 학문의 수풀을 통과해서 아레른테 이야기 따라가기

갈라진 틈

우리 세계의 실재와 그것에 대한 이해 사이에, 학문이 존재한다. 학문은 이 간극을 어떻게 메울 수 있는 지를 상상하는 일이다. 그 간극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일은 있을 수 없음을 알면서 말이다. 실재는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재를 인식하는 과정은 실재에 영향을 주게 된다. 즉, 실재는 우리의 이해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우리의 이해의 과정은 실재를 우리에 의존하는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분명 역설이다.
이러한 역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역설 자체를 부정하는 데서부터 니힐리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우리의 ‘정상 과학’에서 취해지는 설명은 ‘텍스트의 해석’이다. 이 설명에 따르면, 텍스트는 엄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연구의 대상이다. 텍스트는 역사가에 있어서 자연 과학에서의 사실에 해당된다. 텍스트의 존재 자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그 존재는 외부의 독자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런데 텍스트의 의미는 단일하거나 자명하지 않고 불투명하기 때문에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요청되며 해서 그것을 구분짓고 의미를 발견하고 해독하는 역사가가 요청된다. 기본적으로 문화와 역사의 연구는 텍스트의 의미를 밝혀내기 위한 해석의 노력이다. 해석 작업은, 견고한 대지인 주어진 것(주제)과 의미의 부여 사이를 단단히 묶는 일이다. 해석은 우리의 이해와 실재 사이의 간격에 다리를 놓는 일이다.
흔히 그렇게 전제되어 왔다. 그러나 논의의 기반인 텍스트의 개념은 과연 견고한 것일까? 학자와 연구 대상의 관련성은 어떠한 것인가? 텍스트의 독립성이 증명된 적은 없지 않은가? 이것은 이 글에서 씨름해야 할 역설이다. 이 글에서는 ‘이야기 따라가기’(storytracking)라는 방법을 사용하면서, 최근의 논의에서 실재로서 제시된 문화에 대한 보고를 추적해 나갈 것이다. 이것은 학문에서 실재에 이르는 다리가 어떻게 놓여졌는지를 분석하고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야기 따라가기란, 학술적 보고에서 텍스트로서 제시된 자료를 원래의 출처와 비교해보는 단순한 방법이다. 그것은 인용의 연쇄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설명의 판본들을 비교하고, 학자들간의 상호 관계, 학자-대상의 관계를 밝히는 일이다.


“늠바쿨라와 성스러운 장대”

1. 엘리아데의 텍스트: 엘리아데에 따르면, 공간은 균질적이지 않고 특정한 장소가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그 곳이 중심이며, 그것은 종교와 같은 뜻이다. 그러한 핵심 주장은 다음의 아레른테의 사례에 의해 뒷받침된다.
늠바쿨라는 ‘무로부터’ 생겨나, 산들과 강들, 모든 종류의 동식물을 만들며 북쪽으로 갔다. 그는 또 ‘영적인 아이들’(쿠루나)을 만들었는데, 많은 수의 아이들을 자기 몸속에 감추었다. 그는 마침내 창고를 만들고 그가 만드는 추링가를 감추었다. 그 때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쿠루나를 추링가에 집어넣었고, 거기서 첫 번째 아칠파(신화적) 조상이 생겨났다. 다음에 늠바쿨라는 많은 수의 쿠루나를 다른 추링가에 넣어 다른 신화적 조상들을 만들었다. 그는 첫 아칠파에게 다양한 토템들에 관련된 많은 의식들을 행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늠바쿨라는 성스러운 땅 중앙에 카우와-아우와라는 장대를 심었다. 거기다 피를 바른 후에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첫 아칠파에게 따라 올라오라고 했지만 피 때문에 장대가 너무 미끄러워 그 사람은 미끄러 떨어졌다. “늠바쿨라는 혼자 올라갔고 장대를 들어올린 후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이 신화적 집단에 사고가 일어났다. 깊이 박혀 있는 카우와-아우와를 뽑다가, 한 족장이 그것을 땅 위에서 부러뜨리고 만 것이었다. 그들은 다른 집단을 만날 때까지 부러진 장대를 들고 다녔다. 그들은 너무 지치고 슬픈 나머지 자신의 카우와-아우와를 세우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다만 함께 누워서 누운 자리에서 죽어갔다. 큰 돌로 덮인 너른 동산이 솟아올라 그 자리를 표시하고 있다.”(Australian Religion, pp.50-53)
엘리아데는 장대를 중심 장소로, 사라진 창조주와 소통하는 통로로 이해한다. 소통의 단절은 아칠파에게 중심과 의미의 상실이다. 게다가 장대를 잃고 죽어가는 이야기에 엘리아데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 이야기는 <<성과 속>>에서는 스펜서와 질렌에 의해 실제로 관찰된 민속지적 자료인것처럼 나오고, <<호주 종교>>에서는 신화적 설명에 대한 민속지적 관찰인 것처럼 나온다.
엘리아데는 스펜서와 질렌의 자료를 사용하면서, 인용부호를 통해 독자들에게 자료의 사용을 환기시킨다. 그가 사용한 자료는 아레른테 문화에 대한 ‘텍스트’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료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엘리아데는 사실적 자료에 대해 해석을 부가하였을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엘리아데의 이론과는 별도로 자료가 존재한다는 듯이.

2. 스펜서와 질렌의 <<아룬타>>(1927): 엘리아데의 글과 인용 자료인 <<아룬타>>를 비교해 보자. 엘리아데는 늠바쿨라라는 태초의 인물을 상당히 강조하며 서술한다. 그러고 조상들의 긴 여행을 ‘끝없는 방랑’이라고 일축한 뒤 칠파 집단 중 한 사건, 즉 장대가 부러져 죽는 이야기로 넘어간다. 사실 다른 집단들의 이야기도 죽는 것으로 끝나고, 다른 조상들의 죽음은 장대가 부러진 것과 상관없이 이루어진다. 엘리아데는 선택, 조직화, 제시에 의해 거의 잡탕(concoct)이 된 것을 일차 자료인 것처럼 제시한 셈이다.
텍스트는 학자의 창작이다. 엘리아데는 이론적 확증을 위해 자료를 사용했지만, 그 확증은 아레른테를 희생하고얻어진 꼴이 되었다. 아레른테에 엘리아데가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아레른테가 엘리아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3. 스펜서와 질렌의 <<원주민 부족들>>(1899): 그렇다면 스펜서와 질렌의 자료 자체는 어떠한지 살펴보자. 과연 아레른테는 누구에 의해 기술되었으며, 설명하는 이는 아레른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스펜서와 질렌은 <<원주민 부족들>>(The Native Tribes in Central Australia)를 1899년에 출판하였다. 질렌은 1912년에 죽었고, 스펜서는 1926년에 다시 현장조사를 하여 1927년에 <<아룬타>>(Arunta)를 쓴다. (엘리아데는 1927년의 저서만 인용하였다.) 30년의차이가 있는 두 저서를 비교해 보면, 창조주로서의 늠바쿨라와 그가 장대를 타고 올라간 이야기가 초기 저작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천상의 존재가 지상에 내려와 원형적 존재로부터 인간을 만들고 도마뱀으로 변한 이야기는 둘 다에 나온다. 엘리아데가 인용한 늠바쿨라 이야기는 스펜서가 1926년 조사 후에 첨가한 부분인 것이다.

4. 스펜서와 질렌의 초기 현장 조사: 스펜서와 질렌은 1894년 탐험중에 만나, 1896년 현지 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프레이저의 도움 아래 1899년에 책으로 발간한다. 1899년 판에 엘리아데의 설명과 관련된 것은 두 부분으로, 하나는 인간의 창조에 관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칠파 조상들이 여행하고 의식을 행하는 토템 집단 이야기들이다.
칠파 조상 이야기들은 다음과 같다. 대개 조상들은 땅으로부터 나와서 여행을 하고, 특징적인 여러 지역들을 통과하고, 의식을 행한다. 그들은 ‘스스로 뛰어 올랐다’고 묘사되는 것으로 보아 창조되지 않은(피조물이 아닌) 존재이다. 이야기들은 조상이 죽거나 추룽가로 변모하는 것으로 끝맺어진다. 조상들은 특정 지역에 추룽가로서 보존된다. 장대 이야기는 이들 이야기 중 한 집단에서만 나타난다.

5. 인간 창조 설명: <<원주민 부족들>>의 인간 창조 이야기는 1927년 판에서 약간 변모되며, 특히 늠바쿨라 창조 이야기가 보충된다. 인간 창조 이야기는 엘리아데에 인용된 부분은 아니지만 스펜서와 질렌의 종교와 문화에 대한 전제를 보여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남자와 여자가 있기 전, 서쪽 하늘의 두 존재가 형적인 인류를 본다. 그들은 내려와 팔다리 등등을 깎아내어 그것들을 인간으로 만들어낸다. 이 과정은 여러 동식물들이 인간으로 변형되는 과정에 해당하며, 이는 토템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다. 일을 마친 후 천상의 존재들은 도마뱀으로 변한다.
이 이야기를 구성하면서 스펜서는 질렌의 두 개의 일지를 참조하였다. 그것은 각각 1894년과 1897년의 기록이다. 1894년 일지에는 인간을 만든 어떤 영적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 사람은 큰 고슴도치 종에 속한 것으로 이야기된다. 1897년에는 짠물이 걷힌 후에 ‘파리잡이 도마뱀’이 사람을 만든 이야기가 있다.
스펜서는 이 두 기록을 조합하였고, 특히 그들의 신화 시대(알체링가)를 네 시기로 나누어야 한다는 원칙 아래 배치하였다. 창조 이야기는 제일 첫 시기에 해당한다. 스펜서는 일단 짠물로 뒤덮힌 초기의 혼돈 상태를 배경으로 제시한다. 이를 배경으로 하늘에 거주하는 두 인물을 소개한다. 질렌과는 달리 그들을 파리잡이 도마뱀과 동일시하지 않고, 운감비쿨라라는 표현을 고유명사화하여 부여한다. 게다가 자료에 없는 “그 시절에는 남자도 여자도 없었다”는 구절을 덧붙인다. 그리고는 두 기록을 혼용하여 창조에 대한 묘사를 구성한다. 스펜서는 아레른테 신화에 대한 자신의 시간적 분류체계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록을 조합해 창조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하나 만든 것이다.

6. 스펜서의 1926년 현지 조사: 1926년의 <<아룬타>>의 이 부분에는 두가지 변화가 있다. 하나는 운감비쿨라가 늠바쿨라로 대치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마지막 문장인, 창조주가 도마뱀으로 변했다는 내용을 빼버린 것이다. 이 변화는 아레른테에 우주 창조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인간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있어야 한다는 저자의 기대를 충족시킨 것이었다.

7. 스펜서의 1927년 창조 이야기: 우리가 본 대로 늠바쿨라는 1927년 저작에 처음으로 나온다. 스펜서는 1926년의 조사 때 찰리 쿠퍼라는 새로운 조력자를 얻는다. (그는 1894년 조사 때 제의를 행한 사람으로서는 생존해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고맙게도 그 사이에 영어를 연마하였다.) 스펜서는 쿠퍼에게서 늠바쿨라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1926년 6월11자 일지와 6월 26일 일지가 그에 대한 내용이다.
스펜서는 <<아룬타>>의 창조 이야기 부분에서 두 기록을 선택적으로 사용한다. 그 과정에서 원래는 첫 번째 칠파 인간을 만들어낸 주술사였던 늠바쿨라가 우주의 창조자로 변모하였다.스펜서는 늠바쿨라가 여기저기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원문에는 없는 내용, 즉 늠바쿨라가 만물을 창조하였다는 문장을 삽입하였다.
스펜서는 한 각주에서 아레른테 신화의 시기 구분이 자의적인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 시대 구도는, 천상의 존재가 인간을 창조한 우주 창조의 시기를 요구하고 만들어내게 한 것이다.

8. “늠바쿨라와 성스러운 장대” 정리: 엘리아데는 스펜서와 질렌의 <<아룬타>>의 한 부분에 기반해 설명하였다. 엘리아데의 20문장의 잡탕 설명은 스펜서-질렌의 45페이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는 특히 스펜서-질렌에서 30페이지 떨어져 있는 두 대목에서 영감을 받는다. 엘리아데의 늠바쿨라 설명에 관련된 「아룬타」의 한 대목은, 스펜서가 1926년에 쿠퍼에게 들은 두 보고를 잡탕한 창조 이야기에 기초한 것이다. 엘리아데가 사용한 다른 한 대목은 스펜서가 두 개의 질렌의 현장 보고를 편집하고 합성하여 나온 것이다. 스펜서는 아레른테 신화를 위한 연대기를 구성하였고 최초 창조 시기를 위한 자료를 생산하기 위해 창조적이고 손이 많이 간 편집을 수행하였다.

9. 아레른테의 자료: 스펜서와 질렌에게 아레른테에 대해 말해준 사람들은 누구일까? 스펜서와 질렌이 아레른테 언어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는 사실은 그냥 넘길만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원주민 영어(aboriginal English)를 통해 정보를 얻었다. 그러나 원주민 언어는 한계가 많은 소통 수단이다. 원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를 전혀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원주민 영어를 구사한 이들은 통역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유럽인들과 상거래를 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전통에서 벗어난 이들이다. 물론 1926년에는 전통적인 종교인이었던 쿠퍼가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스트렐로우는 그가 스펜서에게 제공한 창조 이야기는 그에 의해 고안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그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으니까.


오직 수풀뿐

처음에는 하나의 간극, 즉 한편에는 해석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대상, 즉 아레른테의 실재가 존재하는 간극을 상정했었다. 그러나 아레른테의 정보의 원천으로 접근해 들어갈수록, 실재의 대지가 비원주민의 발걸음에 여지없이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실재와 해석의 간극은 사라졌다. 오직 해석만 있을 뿐이므로. 한 명의 아레른테 인을 거명할 수 있긴 하지만, 그는 비원주민들의 놀음에 저당잡힌 것처럼 보인다. 또 질렌은 스펜서의 놀음에 저당잡혀 있었다. 스펜서와 칼 스펜서는 프레이저, 랑이 벌이는 더 큰 놀음에 저당잡혀 있다. 아레른테의 목소리는 없다. 비원주민으로부터 독립적인 아레른테는 없다.
학문의 수풀을 통과해 실재에 이르려던 이야기 따라가기는 실패했다. 계속 수풀이기 때문에. 이야기 따라가기의 모든 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원자료의 내용 요소들을 자유로이 끌어다가 아레른테의 묘사를 섞어서 일차적 자료처럼 보이는 학술적 행위였다. 이러한 잡탕들은 연구자의 일반적 시각에 의해 절대적으로 영향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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