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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발제

Comaroff, "Of Revelation and Revolution" I-3,4,5

by 방가房家 2023. 5. 8.
3. Africa Observed

3장에서는 유럽에서 아프리카의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정리하고 있다. 지리적 탐사와 여행기에서 생성된 자료들이 어떻게 과학 지식과 결합하고 ‘노블 새비지’의 이미지를 형성하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아프리카 내륙은 오랫동안 유럽인들에게 미지의 지역으로 남아있었고, 18세기 말부터 탐험대를 조직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 이 지역을 탐사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니제르 강 탐사 이야기를 담은 문고 파크(Mungo Park)의 <<Travels in the Interior of Africa>>(1799)는 아프리카 내륙 사람들의 이미지를 형성한 대표적인 여행기이다. 이 책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은 해변 지역 사람들의 강인한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유순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그려진다. 이 책은 무지와 이단의 암흑에 빠져있는 아프리카인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도덕적 분위기를 형성하였으며, 이 분위기는 복음 전도 운동의 이상을 강화시켜주었다. 1801년에 출판된 배로우(John Barrow)의 <<Account of Travels into the Interior of Southern Africa in the Years 1797 and 1798>>은 영국의 케이프타운 식민지 진출을 배경으로 저술된 여행기이다. 아프리카 인들에 대해서는 유순한 이미지를 유지하는 반면에 그 지역에 진출해 있던 네덜란드 인들의 난폭함을 비판하고 있다. 반면에 네덜란드 정부와 관련해서 이 지역을 여행한 자연사학가 리히텐슈타인(Lichtenstein)은 네덜란드인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서술한다. 이 책들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른 보고를 하고 있지만, 아프리카 인에 대한 이미지는 공유된다.
아프리카 인들에 대한 보고는 ‘과학적’ 담론과 결합되어 인간에 대한 진화론적이고 위계적인 관점을 확립하게 된다. 검은 피부빛을 비롯한 아프리카 인들의 신체 특성들은 유럽인의 특성과 대조되며, 코카서스 인종을 정점으로 하는 발달 과정에서 아래 단계의 특성으로 규정된다. 네덜란드 학자 캠퍼의 두상 스케치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아프리카인의 두상 스케치를, 원숭이로부터 유럽인에 이르는 하나의 계열 안에 위치시킨다. (102-3쪽 그림 3a, 3b) 아프리카 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담론은, 그들을 <동물의 왕국> 내의 호기심거리로 묘사하는 데서 극에 달하는데, “호텐톳 비너스”가 가장 비극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에서 구경거리로 전시되다가 생을 마감한 이 아프리카 여인에게서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여인의 생식기였다. 이 사건은 또한 ‘흑인’ 타자를 여성화시켰던 유럽인의 관점과도 연결된다. 아프리카 인에 대한 담론은 당시의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인 담론(예를 들어, 뇌와 생식기는 동시에 발달될 수 없으므로 여성 교육에 회의적인 관점)과 결합되었다.
아프리카인에 대한 다른 이미지는 낭만적인 관점에서 그들을 고통받는 순수한 사람들, 때묻지 않은, 잃어버린 유럽인들의 순수성을 간직한 사람들로 보는 입장이었다. 사실 아프리카 선교에는 낭만적 관점과 멸시의 관점이라는 두 상충되는 관점이 깔려 있었다. 한편으로 아프리카 인들은 ‘버려진 어머니’로서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순수한 사람들이었고(110-111쪽의 그림4a, 4b), 다른 한편으로는 뱀으로 표상되는 악마적 이미지로도 나타났다(112-113쪽의 그림 5a, 5b). 아프리카 인이라는 이름 하에 여러 타자들의 특성들이 무분별하게 혼합되었으며, 그 이미지는 문학 작품들을 통해 유행하였다. [검은 피부빛이라는 이미지에 관련해서, 유럽인들의 인식에서 일본인들이 오랫동안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들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비교해서 생각해볼만하다. R. Kowner, "Skin as a Metaphor: Early European Racial Views on Japan, 1548-1853," Ethnohistory 51-4 (2004):751-778.]
유럽에서 아프리카 인들에 대한 논의는 1800년대 초 노예제 찬반을 놓고 격렬하게 벌어지게 된다. 이 논의는 논자들의 경제적 이익의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영국에서 1807년에 노예 금지를 선언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논의의 흐름은 노예제를 반대하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그것은 인간주의에 호소한 것이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노동의 개념에 입각하여 타율적인 노예 노동보다는 교육을 통한 자유노동이 경제적으로 이득이 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담 스미스 식의 경제 논리가 바탕이 되어, 웨슬리도 노예제에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는데, 거기서 그는 인간으로서 노예를 구매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나름대로의 경제적 이득 때문에 노예제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었는데, 그들의 노예제 옹호 논리 안에서는 아프리카 인들의 인간성을 의심하는 격한 이야기들을 볼 수 있다. 자메이카의 역사를 쓴 에드워드 롱(Edward Long)이 대표적인 인물인데, 그는 아프리카인의 동물성을 주장하면서, “오랑우탄 남편은 호텐톳 여인에게 아무런 혐오감도 느끼지 않는다.”라고 서술하였다.


4. African Worlds

이 장에서 저자들은 전형적인 민족지 스타일로 선교 이전의 츠와나 전통 사회를 기술한다. 그런데 저자들은 츠와나라는 단위는 식민지 역사의 과정에서 붙여진 자의적 명칭이지 고유한 민족 단위가 아님을 미리 상기시킨다.
전통적인 츠와나 세계관에 의하면 부족장(보고시bogosi)을 중심으로 한 위계적인 행정조직이 사회를 유지하는 중심이 된다. 부족장이 지배하는 마을(모체motse)은 세계의 중심이 된다. 모체의 복수형이 물을 뜻하는 것도 의미심장한데, 통치자에게는 비를 내리게 하는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츠와나 사회는 (나중에 선교사들이 적극적으로 추방하려고 했던) 다처제를 통해 구성된다. 한 가구 내의 여러 모계 혈통들의 경쟁이 하나의 긴장 관계를 이룬다.
츠와나 사회의 노동(티로tiro) 개념은 사회 내 상호 관계의 연대를 이루는 것이지 교환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다. 티로의 목적은 사회적 사망을 피하는 것이다. 사람들, 관계, 사물들을 생산함으로써 사회적 자신을 계속 생산하는 것이다. 일종의 개인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선교사들이 요구하는 자본주의적 개인주의와는 다른 성격을 갖는다.
생산의 영역에서, 츠와나 사회는 일종의 권력의 딜레마를 갖고 있다. 외적으로는 부족장이 사회 노동의 시기와 움직임을 결정하는 것이 상징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그의 권력을 보장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농경에서 알맞은 시기에 노동을 하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에, 부족장의 지시에만 따르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불이익을 가져오게 된다. 일하는 입장에서는 자신의 결정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사회조직의 구심력과 원심력의 갈등이 생성된다.
츠와나의 사회 질서는 상징과 분류체계를 통하여 표현되며, 무엇보다도 일상의 흐름 속에서 행위 안에 배여 있다. 사람들은 생명의 본체 모야(moya, ‘숨’)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죽음 이후에 집합적인 조상 개념 바디모(badimo)로 통합된다. 바디모는 모체를 지켜주는 체제수호적인 신격으로 기능하며, 반면에 비사회적인 망자는 메디모를 형성한다. 한편 세계의 가장자리에 모디모(modimo)라는 존재의 영역이 있다. 나중에 기독교 하느님이 모디모로 번역된 것 같은데, 전통적으로 모디모의 영역은 하늘이 아니고, 하나의 물건으로 지칭되던 존재였다. 일신론적 개념의 부재 때문에 츠와나에는 종교가 없으며, 영적 존재가 부재하다는 선교사들의 묘사가 있었다. 의례는 치료와 재생의 역할을 하는 고 알라파(go alafa)와 재생산과 강화의 역할을 하는 고 싸야(go thaya)로 나뉜다. 의례는 사회와 우주를 구성하고 변화시키는 실질적인 힘이 된다.
츠와나에 선교가 개시되기 이전부터 서구 세력의 영향은 교역의 형태로 크게 퍼져 있었다. 츠와나 인들은 서양인들의 구슬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주 교역품은 상아, 야생동물 가죽, 타조 깃털 등이었다. 부족 통치자들은 부족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서양인들과의 교역을 독점하였다. 19세기 가장 큰 정치적 격변은 1822-23년 남부 지역에 있었던 샤카와 줄루 족의 봉기였다. 츠와나 인들에게 디파카네(Difaqane)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하나의 공포의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은 슬픈 사건으로 남아있다.

 

 
5. Through the Looking Glass

"Through the Looking Glass"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후편의 영어 제목이다. 자신이 비치는 거울을 통해 타자를 들여다보고, 또 그 세계에 뛰어 들어간다는 절묘한 비유를 통해서, 저자들은 이 장에서 타자와의 만남의 순간에 두 세계에서는 각각 어떠한 의미가 형성되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선교사들의 서한, 보고서, 단행본 등에는 만남에 대한 자의식적인 기술이 담겨있다. 반면에 만남에 대한 츠와나 사람들의 생각은 이야기 형식으로 보다는 몸짓, 행위, 반응, 언어 조작 등 상징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서양인들이 그들에 대해 남긴 기록들을 재해석함으로써 그들의 생각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남의 순간에는 지배하는 자의 확언과 지배당하는 자의 되받아치기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유럽인의 관점에서는 자신과 타자를 비추는 거울로서 아프리카를 바라본다면, 츠와나 인의 관점에서는 거울을 통한 대항 담론을 이야기할 수 있다.
만남을 이야기하기 앞서 선교사들의 글쓰기 양식을 분석적으로 고찰한다. 19세기 선교사들의 글쓰기는 하나의 문학 장르로서 정착되었다. 그것은 개인화된 서사시 형태, 영웅주의적 자서전의 형식을 갖는다. 대략적인 양식은 다음과 같다: 바다를 건너는 것이 시작을 알리는 경우가 많다. / 진정한 통과 의례는 아프리카 해안으로부터 내륙으로 진입하는 단계이다. / 내륙으로 들어가는 길은 선교 기지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 이 여정은 청교도인의 <천로역정Pilgrim's Process>를 재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여정 중의 모험, 그러나 위기는 아프리카 인의 기지를 통해 극복되고 선교사는 뒷짐 지고 있다.
츠와나 선교는 런던 선교회의 캠벨(John Campbell)이 1812년 파송되면서 개시되었다. 그는 모씨비 추장과의 접촉에 성공해서 선교 의사를 타진하였다. 추장의 대답은 같이 살면서 선교하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지만 기지를 세우면 “아이들을 보내 네덜란드 말을 배울” 의사는 있다는 것이었다. 양편의 이해는 달랐지만, 캠벨은 “선생을 보내시오. 내가 그들의 아버지가 되어주겠소”라는 추장의 말을 본국에 전달할 수 있었다. 인간 개념, 소유, 생산 등에 대한 이해가 공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쨌거나 선교는 시작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선교는 빈 역사의 공백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츠와나 인들은 이미 유럽인들과의 접촉을 했거나 그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 경험에 기반해서 백인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거래의 형식으로서 받아들였다.
캠벨의 글에서 처음 선교를 시작할 때의 만남에 대한 묘사를 볼 수 있다. 처음 서술에서 느껴지는 것은 선교사가 이방의 영역에서 “완전히 상대방의 권력 하에” 자신을 맡긴다는 무력감에서 비롯한 불안함이다. 만남의 장면은 선교사가 부족민들을 위해 서양의 물건들을 바치는 순간이다. 청동 빗으로 부족장의 머리를 빗겨주고, 은 머리띠와 사슬을 권력자들에게 주고, 담배도 선물로 마련하였다. 중요한 것은 부족장은 이 행위를 선물 교환, 거래의 행위로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의 ‘우정의 표시’에 대한 보답으로 부족장이 준 것은 ‘선교할 수 있는 권리’ 따위의 것이 아니라 두 선교사 각자에게 훌륭한 소를 준 것이었다. 그러고는 만족할 물건을 얻을 때까지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한다.
선교사들이 준 물건 가운데에는 마지막으로 거울이 있었다. 저자들은 이 물건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앞으로 구사하게 될 광학적 은유의 세계를 대표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빛의 담지자로서, 그들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이교도들의 눈앞에서 암흑을 제거하고 그들 마음에 빛을 가져다 줄 사람들이라는 자기 인식을 갖고 있었다. 거울은 인간의 자아를 바라다볼 수 있게 하는 물건이었다. 브로드벤트는 성경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하느님 말씀 속에서 “거울처럼” 인간의 본성을 볼 수 있게 해 준다고 표현하였다. 선교사들은 자아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부족 생활과 미신 안에 엮이어 있는 ‘사회적 자신’으로부터 해방된 근대적 자아를 가져다주는 것을 의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울을 처음 본 아프리카 인들은 놀라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다. 카메라가 인간성의 본질을 앗아간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아프리카 인들은 거울에도 인간의 본질을 뺏어가는 힘이 있다고 인식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큰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 안에 나타난 것을 보고서는 겁에 질려 소리지르고 도망갔다고 한다.
아프리카인의 입장에서 선교사의 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선교사들이 “힘의 실재”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비인간으로 분류되었던 선교사들은, 총으로 상징되는 힘을 지닌 존재로서 인식되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선물한 똑딱 시계 안에 있는 장난감 병정 인형을 둘러싼 논쟁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츠와나 사람들은 이 인형이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를 두고 논쟁하였다.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혼동시키는 이 존재는, 군사적 정복의 기억과 맞물려 그들에게 하나의 골리앗으로 인식되었다. 유럽인들의 머리카락이 그들의 힘의 실체로 여겨져 숭상되는 등 선교사는 물질적 존재 자체로 그들에게 큰 의미를 지닌 힘의 실체로 받아들여졌다. [첫만남 장면은 열심히 멍석을 깔아놓은 데 비해서는 인상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카고 컬트나 쿡선장을 맞은 하와이인들의 경우처럼 극적인 장면은 아니었다. 이 장의 경우 원주민의 세계관 내에서 만남의 순간이 어떻게 해석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가 풍부하지 못했던 탓이라고 생각된다. 총을 가진 백인과의 만남이 구전을 통해 신화적 사건으로 남아있는 경우로, 위네바고족의 천둥새 부족 전승이 있다. Paul Radin, The Winnebago Tribe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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