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자 웬디 도니거의 책을 다시 읽으면서, 이 할머니 글을 너무 잘 쓴다는 생각을 했다. 전에 읽을 땐 좀 능글능글 눙치는 어투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이번에 보니 쉽게 썰 풀듯이 하면서도 빈틈이 없다. 나는 이 학자의 입장에 찬성하는 쪽이 아니기 때문에 다소 삐딱한 시선으로 글을 읽었는데도, 딱히 흠 잡아낼만한 구석이 없었다. 만만치 않은 내용인데 참 쉬운 말로 쓴다. 일상적인 표현과 이야기들, 그리고 문학과 각종 신화에서 가져온 이야기들로 포스트모던 비평의 주제들까지 다 소화해내고 또 방어한다. 일상으로부터 길어올린 글쓰기와 학문하기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내가 알기로 종교학자 중 이런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종교학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꿈을 탐사하는 엘리아데 식의 로망은 사라졌다고 생각해왔다. 인류가 지닌 꿈과 종교적 상상력의 공통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거대 담론으로 공격받기 쉬운 시대이기에 그런 학자는 요즘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세히 말하기는 힘들지만, 웬디 도니거는 현대 학문 흐름 위에 서면서도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엘리아데 학문을 계승하는 학자이다. 또한 레비-스트로스의 계승자이기도 하다. 참 특이한 학자다. |
어둠 속의 고양이, 짖는 개, 수레, 칼
Wendy Doniger, <<숨은 거미>> 2장1)
비교에 있어서 유사성과 차이성 “어둠 속에서는 모든 고양이가 회색이다”라는 서양 속담을 통해서 다름 속의 비슷함(similarity-in-difference)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우리가 타자를 알게 되는 것은 유비(analogy)를 통해서이고, 같음 혹은 비슷함은 비교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니만큼 ‘같음’을 이야기할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성을 인지하는 일은 중요하다. 구글링을 하듯이 서구 문화의 다양한 맥락 속에서 어둠 속의 고양이 은유가 다양하게 사용된 것들을 탐색하면서2), 도니거는 그 중에서도 특히 ‘같음’이 유발하는 정치적인 위험을 환기시킨다. 이 속담에는 성적인 함의가 있어, 여자들은 침대에선 다 똑같다는 성차별적인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모든 일본인들은 똑같이 생겼다”는 인종차별적 사고와도 맥을 같이 한다.3) (프로이트가 여성성을 ‘검은 대륙’이라고 표현한 것에는 성적 타자와 인종적 타자가 결합되어 있다.) 성적이든 인종적이든, 타자와의 만남에서 겪게 되는 몰개성화, 비인격화가 같음을 이야기할 때 주의해야 할 문제이다. 흔히 인종 차별이 문제라고 이야기하지만 진짜 문제는 차별이 아니라 무차별인 것을.
개는 왜 짖지 않았는가? 그 녀석이 본 것이 친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름, 친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개는 짖어댄다. 다른 문화와의 비교를 통해서 우리는 한 문화에서 이야기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비교는 우리가 당연시 했던 것을 낯설게 해준다.
타자를 알아간다는 것은, 처음에는 비슷하거나 같아 보였던 것들이 알고 보니 완전히 같지는 않다는 것,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다. 처음에 보였던 유사성은 사실 인종중심적인 것이 많다. 남에 대한 이해는, “나도 너와 비슷하기 때문에 너를 이해할 수 있어”에서 “니가 어떤 식으로 나와 다른지를 알겠어”로 진척되는 것이다. 인도의 불가촉천민 신데렐라는 같음의 인식을 통한 다른 신화의 수용이지만, 아직 다름을 이해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의 신화와 남의 신화의 비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제삼의 변이 있어 삼각형을 형성하는 데, 그것은 비교하는 학자의 관심이다. 조나단 스미스의 말대로, “종교학의 비교는 학자 자신의 지적 논리를 위한 학자 마음의 공간 내에 다른 것들을 끌어다 놓는 것이다.” 도니거의 경우, 창세기 38장의 다말과 유다 이야기를 셰익스피어의 <<끝이 좋으면 다 좋아>>(All's well that ends well)를 비교하는데, 여기엔 섹스 거부라는 주제에 대한 도니거의 관심이 세번째 변으로 작용한다.
신화 텍스트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유다는 왜 다말을 알아보지 못했는지, 시아버지와 섹스할 때 다말의 심리적인 정황은 어땠는지, 성서 텍스트에는 내용이 없다. 아우얼 바흐가 지적한 성서의 침묵이 좋은 예가 되는데, 우리가 신화를 이해하는 것에는 단편적인 특성이 있다. 이처럼 이야기의 비어있는 부분들을 “채워주는 것”의 역할을 비교 신화 연구를 통해 다른 신화들이 해줄 수 있다는 것이 도니거의 주장이다. “침묵 역시 하나의 발언일진대, 우리는 그 소리를 다른 소리들과 비교할 때만 들을 수 있게 된다.”(40) “레비-스트로스로부터 우리는 문화 내에서 한 신화에 대한 가장 좋은 주석은 문화 내의 다른 신화라는 것을 배우며, 엘리아데로부터 우리는 문화 바깥에서 한 신화에 대한 가장 좋은 주석은 다른 문화의 신화라는 것을 배운다.”(39) 다른 신화들을 징검다리처럼 이어가며 이야기를 채워나갈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채워나감은 단순한 보충이 아니라 두 텍스트--여기서는 성서와 셰익스피어--간의 상상의 선을 그리고, 그 둘이 섹스할 때 나누는 밀담을 듣는 미묘한 작업이다.
퍼즐을 맞추어나가는 듯한 이런 교차문화적인 작업에는 한 문화를 초월하는 물음이 전제되는 것이고, 이러한 공통분모(commensurability)가 무엇인지에 관해 일종의 보편성에 대한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의 의미”에 관련된. 이 문제는 숨은 거미 은유를 이야기하는 다음 장에서 논의될 것 같다.
같지 않은 이야기와 맥락
똑같은 이야기는 없다. 똑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되풀이할 때도, 다른 순간과 맥락에서 이야기될 때 그것은 다른 것이 된다. 문자적으로 똑같은 내용이, 17세기 세르반테스가 썼을 때는 당시의 평범한 문체가 되고 20세기 천재 피에르 메나르가 썼을 때는 새로운 역사주의 관점을 담은 걸작이 되듯이. 그래서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연구하는 일은 중요하다. 중요하긴 한데, 도니거의 신화 비교는 맥락주의적 연구와는 다른 지점을 겨냥한다. 비교학자가 일반적인 맥락을 아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두터운 문화적 기술이 비교의 기준으로 독자들에게 최종적으로 제시되는 해석의 일부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45). 오히려, “비교를 주장하는 것은 신화를 역사의 맥락에서 끄집어내어서 대신 다른 신화나 관련된 생각들의 맥락을 보충하는 일을 정당화시켜준다.”(45) 중세말 출현한 세속적 사랑이라는 개념이 꼭 새로운 경제적 개인이라는 맥락에 관계되어 설명되어야 한다는 법이 있나? 그 시대를 넘어선 다른 물음과 그에 대한 대답을 탐구하는 것 역시 소중한 일 아니겠는가? 비교의 작업은 역사적 맥락화와 갈등 관계라기보다는 보충적인 관계이다. 교차문화적 관점은 맥락의 관점을 총괄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다른 식으로, 수평적으로 접근하는 대안적인 관점이다. 비교학자는 많은 것을 아는 여우이고 역사적 연구는 큰 하나를 아는 고슴도치인데, 학문의 세계에는 둘 다 필요하다.
<<밀린다 왕문경>>의 수레와 인도 목수의 칼
바퀴, 축, 바큇살, 멍에 등 수레를 이루는 각 부분들이 다 새것으로 교체되어도 수레는 옛날의 그 수레이다. 칼날과 칼자루가 계속해서 새 것으로 갈아끼워 넣어져도 칼은 이전의 그 칼이다. 도니거는 수레와 칼의 은유를 두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사용한다: 하나의 이야기가 많은 변형으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지속되는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 하나의 이야기가 문화를 넘어서는 변형들을 갖고 있다고 할 때 그 본질적인 통일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은 비교적 수월하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두 번째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교차문화적 작업은 ‘공유된 의미의 중심’을 이야기한다. 문화적 다름을 이야기하는 학자라면 배에 대한 흄의 은유와 수레에 대한 불교 은유는 다른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교차문화주의자는 많은 신화들이 모든 부분들이 바뀌어도 전체는 존속한다는 점을 이야기한다고 주장할 것이다.”(51). 원형을 전제하지 않으면서도 특정한 신화 주제의 이동(transmigration)을 주장하기 위해 도니거는 불교 이야기를 사용한다. 어떤 사람이 한 등(燈)에서 다른 등으로 불을 옮길 때, 등이 다른 등으로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런 옮아감 없이 환생이 가능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문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단일한 그 무엇이 없다고 하더라도 다른 문화의 다양한 다른 이야기들 사이에는 연결성이 존재한다.”(51)
비교 작업은 계몽주의적 입장과는 다른 태도라는 것을 천명하면서, 도니거는 자신의 이론적 입장을 분명히 밝힌다: “계몽주의는 비교 동네에서 깡패다. 그것의 이성주의는, 신화와 동화는 실제 사람들에 대한 진짜 이야기에 근거한다는 것뿐 아니라 원래 특정한 진짜 사람에 대해 말해진 이야기라는 유헤메리즘의 일종을 부활시켰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 이야기들은 처음부터 처음 이야기된 특정한 개인을 넘어 확장된 인류의 문제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51-52) “사회적 조건에 대한 유헤메리즘적 강조는 살아있는 비교문화적 체험을 원형이라는 괴물에서 구해냈다. 그건 좋다. 그러나 비역사적 구조보다 사회적 맥락을 강조하는 것은 상상력보다 경험주의를 선택하는 것이다.”(52) ‘엘리아데의 역사적 관점 부족에 대한 조나단 스미스의 유용한 교정에 대한 로렌스 설리반의 교정’을 언급하며 끝맺는 데서도 스미스와의 입장 차이가 분명하다. 즉, 사회과학은 서구 식민 세력의 강력한 세계관에 대한 방어와 벗어남을 위해서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맥락만 고집하는 것은 신화적 혹은 상상의 인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 고집은 비교문화적 신화 연구의 죽음이 될 것이다.”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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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니거에 대해서는 최화선의 소개글을 참고할 수 있다. (http://my.dreamwiz.com/b813/paper/doniger1-2-c.htm) 한편 2장에 대한 다른 발제문으로는 http://my.dreamwiz.com/b813/paper/doniger2-3-2.htm을 볼 것.
2) 여기에 한국 영어 교실의 맥락을 추가한다: All cats are grey in the dark. 어둠 속에서는 모든 고양이가 회색이다. ☞겉모습으로는 다르게 보이는 것도 그 본질은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외형적 모습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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