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배움/발제

고린도전서, KIN

by 방가房家 2023. 5. 3.

Jonathan Smith, "Re: Corinthians," Relating Religion. 의 발제문


Translation
파푸아 뉴기니 앗발민 사람들은 197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하게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전통 종교들과 긴밀히 얽혀있는 앗발민 사회의 일상생활을 버릴 수는 없는 일: “기독교 개종에도 불구하고, 여기 사람들은 통상 고유의 사회 종교적 관계들의 역사에 의해 구성된 주거지, 경계, 혈통 집단이라는 토착 지형 속에 자리잡고 사는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인식의 지형 위에서 기독교를 해석하는 상황에서, 여러 선교 사례들에서 쟁점이 되는 “번역”의 문제가 대두된다. (주41번 참조)
 
1980년대 이 지역을 강타한 두 종교 운동들--기독교 부흥운동과 하물 숭배형의 신종교운동--은, 기독교에 대한 태도는 상이하지만, 기본적으로 기독교 개념과 전래의 조상 개념의 결합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공유하고 있다. 앗발민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신화가 아니라 성령이라는 기독교 신화였다. 우주적 힘으로서의 바울의 죄개념은 무의미했다. 앗발민 기독교인들에게는 (가끔 그리스도 재림과 연관되기도 하는) “영을 보내심”이야말로 전통과 기독교 간의 긴장에서 배태되는 죄를 소거해주는 신화로 기능하였다. 그들이 받아들인 영(성령) 개념은 조상령 개념과 연속선상에 있었다.
전통적 신행 위에 기독교 개념이 덧씌워지는 상황은, 앗발민의 사례와 고린도 공동체를 비교할 수 있는 포인트가 된다. 짧은 시기 내에 여러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 작은 동질적인 공동체 내에서 여러 종교를 수용하는 실험을 거쳤다는 점에서 앗발민과 고린도 공동체는 비슷하다. 이 사회적인 조건을 바탕으로, 앗발민의 사례를 고린도 공동체의 상황을 비교하여 이해하는 데 활용한다.
 
 
Redescription
앗발민 사례와의 비교연구를 통해서 고린도 공동체의 모습은 새로 그려진다. 고린도인들은 조상들과 결부된 전통적인 영 개념을 갖고 있었으며, 그에 의해 바울의 새로운 영 개념과 이해의 충돌이 일어났다고 이해될 수 있다. 영, spirit, 그리스어로는 pneuma라는 언어를 놓고 서로 다른 이해들을 했다는 것.
가족 종교에 바탕을 둔 조상으로서의 영 개념, 사자와 연관된 영 개념은 고대 서남아시아에 널리 퍼진 것이었다. 엘로힘이란 단어가 예외적으로 죽은자의 영, 혹은 유령을 의미한 부분은 이러한 신앙의 반영이다. (사무엘상 28:13) 고린도인들은 이러한 신앙을 바탕으로 바울의 말을 들었다. 신약에서 프뉴마가 “예외적으로” 죽은 자의 혼으로 번역될 때가 있다.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지 않으냐? (누가 24:37-39)
여러분은 축하 행사에 모인 수많은 천사들과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집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께 나아왔고,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하는, 그가 뿌리신 피 앞에 이르렀습니다. (히브리서 12:22-24)
 
고린도인들에게 프뉴마는 그러한 개념이었다. 성령이 권능을 부여한다고 했을 때(여러분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이 주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카전서 1:6)), 영에 의해 권위가 부여될 때(내 의견으로는, 그런 여자는 그대로 혼자 지내는 것이 더 행복할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고전 7:40)), 기존의 제의적 맥락에서 영 개념이 이해되었다. 프뉴마가 지혜(gnosis)와 결부될 때도(고전 7:40), 바울과 고린도인들이 생각한 것은 달랐다.
앳발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린도 공동체에서 그리스도 신화는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 받아들여진 것은 성령의 이야기이며, 그것은 전통적인 이해의 기반에서였다. 고린도전서는 양측간의 불협화음으로 차 있다. 우상에 대한 경고며, 식습관에 대한 논쟁, 부활 개념 등.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먹을 때에, 사람마다 제가끔 자기 음식을 먼저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에게는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고전 11:20-22)
불신자들 가운데서 누가 여러분을 초대하여, 여러분이 거기에 가려고 하거든, 여러분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나 양심을 생각하여 묻지 말고 드십시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이것은 제사에 올린 음식입니다" 하고 말하거든, 그렇게 알려 준 사람과 그 양심을 생각해서, 드시지 마십시오. (고전 10:27-28)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무엇 하려고 그런 일을 합니까? 죽은 사람이 정말로 살아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습니까? (고전 15:29. 죽은 자를 위한 세례라는 이 부분은 고린도인들의 조상 숭배의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그 많던 조상들은 어디로 갔나?" 참고)
 
(고린도 지역의 아폴로 신전)
 
 
Rectification

조나단 스미스는 단언한다. 고린도전서는, 사도신경의 오순절 이야기와 함께, 기독교사 뿐만 아니라 종교학 데이터를 오염시킨 텍스트라고. 카리스마 운동, 비의 종교, 고대의 제의 결사와 현대의 제의 결사의 유형이라는 개념들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토착 종교전통들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는 (아레오바고 연설(사17:16-34)과 함께) 선교지에서 만나는 고유 종교 제의들을 묘사하는 규준으로 사용되어 왔다. 중국의 전례 논쟁도 그러하지만 수마트라 지역의 네덜란드 칼뱅파 선교사들의 논쟁도 그러한 예이다. 성서가 다른 지역 종교를 서술하는 규점으로 작용하고, 다른 한편 그 지역 사람들은 성서에서 비롯한 개념들을 통해 자기 전통으로 새로 규정하고, 이렇게 생성된 인류학 자료들이 다시 종교학과 성서 연구에 다시 영향을 미치는 악순환. 잘못된 이론에 의해 영향받은 자료가 다시 그 이론을 뒷받침하는 고리를 끊어주는 것이 바로 스미스가 하고자하는 개정(rectification) 작업일 것이다.
그러나 스미스가 끝부분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개정 작업은 이제 시작이다. 그는 “영” 개념의 재서술을 통해 엄청난 가능성을 열어보이기 시작했을 뿐이다. 죄 개념, 희생 의례, 기독교에 의해 확장된 가족 개념의 적용 등 중요한 개념들을 재서술할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고린도전서 텍스트와 선교지 자료들이 얽어 놓은 이론 체계를 개정해야 할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