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한 해석의 전권을 위임하는 일은 당연했다. 중세에는 이러한 죽음의 예술(ars moriendi)을 담당하는 주체가 영적 대리인, 즉 목사나 신부였으며, 현대에는 의사가 전권을 위임받아 ‘백의白衣를 두른 반신半信’으로까지 일컬어지는 추세이다.……성직자들이 죽음의 순간이 도래했다고 확신하였을 때 그 사람에게 영원한 안식을 부여한다는 의미로 성스러운 ‘마지막 향유’를 이마에 떨어뜨리는 행위는 사망 직전 단 한 번 이루어졌고, 이는 수백년 간 절대불변의 임종 예식 절차로 인정받아왔다. 그러나 오늘날 천주교뿐만 아니라 개신교에서도 ‘마지막 향유’는 더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의사가 가지는 전지적 후견자로서의 태도는 특히 임종과 관련해서 볼 때 근본적 문제가 있다. 의학에서 의료행위란 환자를 건강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하므로 환자의 사망은 곧 건강의 소멸을 의미하여 의사의 의료행위가 실패했다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본다면 어차피 모든 환자는 언젠가 죽게 될 것이므로 의료행위는 결국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의료행위의 초점은 다소 비의학적 요소가 포함되더라도 환자의 안녕에 둘 것인가 아니면 의료산업에서 절대적으로 추구하는 강력한 죽음의 통제를 통한 생명의 연장에 둘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 있을 뿐이다.
지안 도메니코 보라시오,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 존엄사의 의미와 그 실현가능성>>, 김영하 옮김 (동녘사이언스, 2015), 18-20.
1. 과거에는 종교인이 죽음의 문제를 전담했으나 이제 의사들이 일을 떠맡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인수인계 작업은 있었는가? 들어본 적이 없다. 의사들이 죽음의 순간에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훈련이나 교육은 없을 것이다. 개인적 역량에 맡겨져 있을 뿐.
2. 질병에 승리하는 내러티브만을 갖고 있는 의사에게 죽음은 실패의 순간이다. 환자와 그 가족이 갖는 죽음의 의미는 잘 공유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의사에게는 함께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이 부여되고 있다.
3. 일종의 협업이 필요할지 않을까? 과거처럼 종교인이 죽음을 관장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죽음을 다루는 그들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일을 나누어야 할 것 같다. 다만 정확히 어떤 모습의 협업인지는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종교는 이러한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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