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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교리

<종교개혁> 중에서 루터에 대한 메모

by 방가房家 2023. 4. 26.

패트릭 콜린슨, 이종인 옮김, <<종교개혁>> (을유문화사, 2005).


작은 책이지만 이 책에는 든 것이 굉장히 많다. 문장 하나하나가 따끔거리면서 역사의 아이러니들을 건드려주고 우리의 상식들을 비틀어주는 맛이 그만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책이란 따분하기보다는 차라리 틀리는 게 낫다”는 특이한 지론을 펴는데, 그것은 내 취향과 상당히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내용 하나하나가 진부한 것이 거의 없고, 드는 예들도 자극적인 것이 많아서, 종교개혁이라는 복잡하고 방대하기 그지없는 영역을 스릴을 느끼며 횡단하게 된다. 물론 저자의 이야기들이 흥미롭고 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주는 자극들은 대학자의 통찰에서 나오는 것들이기에 두고두고 생각할 거리들을 남기는 것들이다.
그 예로서 루터에 대한 언급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매력이 잘 느껴지리라 생각된다. 그는 루터를 그 시대의 사람으로서, 이전 신학의 연장선상에서 설명한다. 역사적 설명으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종교개혁에 대한 개신교적인 편견과 충돌하는 진술이다.
사실 루터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불쑥 나타난 것이 아니라 중세 후기 신학의 풍부한 원천 속에서 나온 것이다.(31)
종교개혁은 그 자체(종교개혁)의 시각에서 볼 때 ‘새로운 것’이 아니었음을 이해하는 것이 지혜의 시초이다. 종교개혁 당대의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것’이란 근래 몇 세기 동안 진리로 통했던 중세의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벗어난 것을 뜻했다. 이렇게 볼 때 루터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 중세의 가톨릭 교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교황에 대하여 거친 말을 하는 것조차 루터에게서 시작된 일이 아니라 100년 전부터 줄기차게 전해져 내려온 중세 후기의 유산이었다.(42)

이것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한다. “낡은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변!” 끝내주는 표현이다.
근대인이라기보다 중세인이었던 마르틴 루터는 낡은 질문들에 대하여 새로운 답변들을 제시했다. 그는 결코 새로운 질문은 제시하지 않았다.(34)

루터의 신학적 투쟁 과정을 서술하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자극적인 예를 든다. 생각지도 못한 재미있는 예들이 책의 구석구석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사탄과 싸움을 벌인 루터는 신에게 다가가기가 더욱더 어려웠을 것이다. 그 싸움은 경멸에 차고 똥오줌같이 더러운 욕으로 표현되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악마야 나는 또한 똥 누고 오줌도 누었다. 네 이놈 악마야, 네 입을 갖다 대고 내 똥을 한 입 꽉 물어라.’(82)

저자는 루터 신학의 핵심을 알기 쉬운 언어로 이야기해준다. 그 핵심이 어떠한 의미에서 가톨릭 신학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또한 어떤 지점에서 결별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설명을 통해서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의 차이까지 해설이 된다.
여기에는 엄연한 사실이 하나 존재한다. 루터는 자신을 키워낸 종교에서 새로운 구원의 길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임을 발견하는 것은 하나의 깨달음이다. …… 이것은 핵심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이다. 따라서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 가톨릭 신앙의 정수이지, 결코 루터의 최종적이고 성숙한 입장이 아니었다. …… 그러나 루터는 그 둘(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justification과 거룩하게 하는 것sanctification)을 별개의 것으로 파악했다. 루터는 사상이 성숙해짐에 따라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또 다른 의화를 통해, 즉 예수의 의화를 통해 가능하다고 가르치게 된다.(86-87)
그 둘(프로테스탄티즘과 가톨릭주의) 사이의 간극은 본질적으로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느 차이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신의 형상을 한 인간의 창조가 계속하여 앞을 향해 진척되다가 그리스도의 인간 구원 속에서 영광스럽게 완성되는가?(가톨릭시즘) 아니면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비천한 창조물로서, 신의 압도적인 은총 없이는 버러지에 불과한 존재인가?(프로테스탄티즘)(89)

이렇게 무거운 이야기를 해놓고, 다음과 같은 비유를 덧붙인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저자의 식견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 진행에 기름칠을 해준다. 셰익스피어나 서양 고전 음악에 대한 소양이 없는 나로서는 저자의 격조 높은 비유들이 꽤 당황스러울 때도 많았다.
양자의 차이는 화려한 루벤스와 수수한 렘브란트의 차이이다.(89)

후대의 입장에서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 역사의 한 장면이, 당대의 시점에서는 그냥 하나의 사건으로 진행된다는 담담한 서술도 인상적이다.
95개 논제를 ‘붙이던’(붙였건 아니건) 1517년 10월 31일 당시의 루터는 아직 이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런 일차적 항의 이후에 루터에게 벌어진 일들의 결과로, 서구 기독교가 신학상의 사소하지만 아주 중요한 점을 중심으로 둘로 쪼개어진 것인지도 모른다.(89-90)

*나는 학술서적에 관한 한, ‘전문번역가’보다는 학자의 번역이 더 낫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 책을 보고서는 마음이 바뀌었다. 이종인의 이 번역은, 내가 종교사 분야에서 본 책들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번역이다. 적절한 표현으로 풀어쓰고 글이 잘 흐르게 말을 부려쓰는, 번역자의 기본적인 능력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점들 말고도 돋보이는 것은, 상세하면서도 대부분의 경우 적절한 역주와 정확한 용어 선정이다. 독어, 라틴어, 불어로 된 까다로운 책 이름, 선언문, 팜플렛, 인명과 지명들이 난무하는 이 책에서, 역자는 이 분야 한글 용어의 표준을 제시했다고 해도 될 만큼 적절한(사실 정확한지 내가 판단할 수 없는 수준의 것들도 많지만) 어휘 선택을 했다고 생각된다. 역자가 한국 브리태니커 편집국장이었다는 약력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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