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 Moffett,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Vol. Ⅶ, No.12. December, 1894, pp. 595-596.
평양에서 활동한 선교사 마펫의 눈에 비췬 평양은 이교가 판치는 사악한 고을이었다. 그러한 묘사는 이후에 평양이 '한국의 예수살렘'이 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배경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글에서 사용된 유교 개념의 불분명함에 대해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Practical Confucianism and Christianity in Korea
최근에 한국의 두 번째 도시인 평양으로의 여행 중의 일이다. 나는 주일을 맞아 작은 마을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 나는 이교(heathenism)에 대해 지극히 잔인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아침을 먹은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나의 심부름꾼 아이(boy)가 와서는 거리위에 한 가난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밖으로 나갔을 때, 나는 60세가 넘어 보이는 한 남자가 초라하게 지푸라기 위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밤새도록 그곳에 방치되어 있어서 그 위에 서리가 내려 앉아 있었고 또 매우 기진한 상태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은 할 수 있었다. 그와의 질의를 통해 나는 그가 5일 전부터 노상에서 고통을 받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 것은 당시의 유행하던 관습에 따른 것이었는데, 가장 가까운 마을의 사람들이 그를 지푸라기 위에 방치했고, 그 마을 사람이 다시 그를 그 옆 마을로 옮겼는데 지금 그가 버려진 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그들은 그를 가까이 함으로서 혹시 그들 자신이 죽을까 하여, 또 그의 영이 그들에게 붙어서 해악을 부릴까 하여 그를 방치하였다. 그래서 그 가난한 남자는 마을에서 마을로 옮겨졌고, 서리와 비를 막아줄 덮개도 없이 밤새 방치되었는데, 어떤 음식이나 약이 그에게 전해진 바도 없었고 또 관심도 받지 못하고 여기 저기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이다. 그런 식으로 그는 5일이나 비참하게 내몰려서 거의 힘이 소진되었다. 나는 누군가가 나서서 그에게 음식을 가져다 줄 것을 제안했으나, 아무도 그러지 않았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나는 별수 없이 한 끼니의 음식을 사서 그에게 약간의 미음을 먹였다. 음식을 조금 먹은 후에 그 늙은이는 감사의 눈길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살 것 같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이 힘을 차릴 때 까지 2-3일간 돌보아 줄 것을 간청하였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가 편하게 쉴 수 있고 치료해 줄 수 있는 방을 제공해 줄 것을 강권하였다. 그들과 헤어져 나는 그에게 예수님에 대해, 또 죄의 용서와 고통으로 부터의 해방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그는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고, 조금 밝아졌다. 그와 함께 기도한 후 나는 다시 사람들에게 돌아가 그 남자를 거의 죽일 뻔 한 그들의 무지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나의 말에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 듯 했고, 마을의 대표자 쯤 되는 사람은 방을 찾도록 말하였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그에게 줄 음식에 대해 물어보고, 그 환자가 묵을 며칠에 대한 가격으로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하였다. 나는 그 금액에 동의한 후, 그들에게 내가 돈을 마련할 동안 그 환자를 위한 방을 준비해 달라고 말하였다.
나의 숙소 방으로 들어왔을 때 몇몇 사람들은 그 환자를 보살피는 나의 친절함을 칭찬하면서도 그를 방으로 들이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들을 강하게 설득하였고 더 많은 돈을 주었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말하려고 했을 때 그들은 이미 그를 옮겼다. 그들이 몇 마일 가지 않았을 때, 그 늙은 환자는 죽었고 사람들은 그를 매장하였다.
그 사람들에게 얘기함에 있어, 나는 내 자신이 늙은 선지자처럼 느껴졌는데, 나는 그들에게 심판에 대해 이야기 하였고, 그 들의 행위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였다. 하지만 나는 분노보다는 연민을 느꼈는데 왜냐하면 이 불쌍하고, 비천한 사람들, 인간애가 메마른 것 모두가, 잘못된 정부의 통치와 압제, 그리고 유학자들의 가르침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나는 평양 시내의 대로를 가다가 이 사람들의 또 다른 타락상을 보여주는 사건을 목격하였다. 내 앞에서 많은 아이들이 방금 길에서 죽은 남자의 시신이 놓여 있는 멍석의 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소리치고 웃으면서 시체를 질질 끄는 오락을 즐겼다. 이러한 사건은 대도시에서 발생한 것이었고, 그 소년들은 상인들의 심부름꾼들로서, 진열된 상품들과 나란히 앉아서는, 그들이 가진 장난꺼리로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나의 방으로 돌아와서, 나는 내가 본 것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내 말을 듣고 나의 심부름꾼 아이는 내가 본 늙은 남자가 누워 있던 곳은 이 거리의 주요 공공건물 앞일 거라고 얘기했다. 그 늙은 남자는 얼마 전에 숙소에서 쫓겨나 지독히 추운 밤에 거리에서 죽었는데, 내가 본 시체는 그런 연유로 거리에서 끌려 다녔다는 것이었다. 또 나는 그러한 일이 특이한 경우가 아니며, 하루에도 두 차례씩 생겼었다는 말까지 들었다.
이것이 유교에서 가르치는 노인과 죽인 이에 대한 공경의 실천이란 말인가? 이러한 것이 예외적인 사례는 아니었다. 그러한 일은 대도시의 빈민촌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유교에 대한 열정으로 유교 학교를 새로이 설립한 관리에 의해 통치되었던 도시 대부분 지역의 대로에서도 발생하였다.
기독교는 한국에서 아직 뿌리내리지 못했으나, 위에 기술한 것들과는 매우 다른 정신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1월 말에, 이렇게 한국의 가장 사악한 도시에서, 여덟 명의 사람에게 세례를 주고, 10명의 신도를 갖게 된 것은 나에게 있어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들은 몇 달 동안 복음서를 배웠고, 진실한 예수님 같은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갖은 욕설과 모욕을 견디어 냈다. 그들이 교회에 있기 한 달 전쯤에, 그들은 나에게 찾아와서는, 기아로 죽어가는 어린 고아들을 돌보는데 자신들이 가진 약간의 돈을 기부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나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들이 예수님 같은 마음을 가지도록 전념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적 실천은 한국에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시카고 종교회의에서 배웠던 기독교와 대비되는 유교와 한국에서 실제적으로 드러나는 유교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