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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선교사문헌

한국인의 정령 신앙(spirit worship)

by 방가房家 2007. 6. 24.
 Heber Jones, “The Spirit Worship of the Korea,” 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2(1901) 중에서(37-41).


한국인의 정령 신앙(spirit worship)

존스의 글에는 한국의 종교에 대한 논의가 잘 정리되어 있는 편이다. 그동안 한국에 종교가 있다/없다의 서구인들의 논쟁은 기실 종교 정의의 문제라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으며, 불완전하긴 하지만 나름대로의 개념을 제시하면서 논의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학문적으로 주목할만한 언급을 보여준다. 헐버트의 자료에서 지적되었던 한국인들 종교의 중층다원성은 여기서 먼저 언급되었다. 이 내용은 여러 선교사들에게 받아들여져 각기 발전된 내용으로 나타나게 된다. 마지막 부분에서 페티쉬즘 개념을 무속에 적용하는 것도 눈여겨볼만 하다.


우리 주제를 소개하는 의미에서 잠시 생각해보고 답을 찾아볼만한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겠다. 그 질문은, “한국인들은 종교를 갖고 있는가?”이다. 지금 한국에 있는 연구자들은 기본적인 합의에 도달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전에는 이것이 큰 논쟁거리였다. 부정적인 의견으로부터 긍정적인 의견에 이르기까지 의견차가 심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의 사람들도 한국인들이 종교에 대한 생각이 전무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었고, 그보다는 오래된 체계들이 부패에 빠져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모든 실제적인 목적에 비추어볼 때 그들이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이 질문은 오늘날 한국 상황을 연구하는 이들에게도 흥미로운 것이지만, 내가 보기엔 용어를 정의하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에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국가 생활(national life)의 단계로서 ‘종교를 가진다’는 표현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떤 이는 그 해답을 가장 작은 가능성의 내용에 국한하여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종교가 국가 생활의 단계에 도달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교의를 받아들이고 제의를 지키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한다. 만약 이것이 충분한 정의라면, 한국인들은 세 개의 종교들, 즉 유교, 불교, 샤머니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한국에는 종교가 있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지닌 사람들의 입장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것이 ‘종교를 가짐’에 대한 너무 저차원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적어도 케어드 총장의 다음의 정의 정도에야 만족할 것이다. “종교는 무한자에 대한 유한한 의지의 복종이자, 개인으로서의 나에 속한 모든 욕망, 성향, 야망을 포기하는 것이고, 나만의 즐거움과 이익만을 향한 모든 목표와 활동을 저버리는 것이며, 나의 의지를 하느님의 의지와 완전히 동일화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기독교 학자는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특정한 기독교적 의미에서 볼 때, 위에 언급된 종교에 대한 어떤 것도 한국인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이야기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한국에는 종교가 없다고 사람들의 주장 내용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갖고 있는 질문을 한국인들의 종교적 감각의 발달에 관련된 질문으로 변형시켜서 해답을 찾을 수 있겠다. 이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적다. 한국인과 잘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들이 낮은 경험의 차원이긴 하지만 종교적 감각을 갖고 있다는 점을 알 것이다.


1. 한국인들은 자신들보다 높고 우월한 것에 대한 의존의 감정을 갖고 있다. 필요한 시기가 되면 그들은 자신들 바깥은 바라본다. 그것은 오직 위의 너른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것일 텐데, 그것은 기대와 희망의 바라봄이다.

2. 한국인들은 인간과 신이 서로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 차원을 갖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3. 우리는 영혼의 괴로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기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세 가지 주관적인 조건들의 배경에는 한국인들에 의해 유지된 다양한 종교 체계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은 인간 운명의 문제와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왔다. 자기가 선전하는 신앙의 우월성에 대한 강력한 개인적 견해에 눈이 먼 선교사나, 현재 사람들이 발전하여 나온 낮은 차원으로 들어가고픈 강한 욕망을 지닌 인류학자들은 한국인들에게 종교가 없다고 확언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로 나타난다. “종교 체계는 모든 진화하는 사회에서 표준적이고 필수적인 요인이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 체계는 한국에 결여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오늘날 한국에 세 형태의 종교 신념들이 퍼져 있음을 언급했다. 그들의 상대적 상태는 무엇인가? 그들은 공동체의 종교적 믿음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고, 그들 중 어느 것도 다른 것들에 배제되지 않는 한국인들의 종교이다. 유학에 의해 유형화된 망자에 대한 숭배는 왕가의 종교이며 국가 종교이다. 한국에서 통치하는 가문은 언제나 국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교는 법에 의해 인정받고 보호받으며 유교 성인들에 대한 국가와 향촌의 제사와 관련된 비용은 공적인 예산이다. 모든 지방관들은 향교에서 제사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유교 의례를 위한 공양미에는 이들 무속 신들 제사를 위한 쌀도 포함된다. 불교의 체계도 어느 정도 공식적인 지위를 갖는다. 강화에 있는 불교 사원은 정부에 의해 왕가 문서 사본의 저장고로 사용되고 승려들은 그것을 지키는 관의 보초가 된다. 다른 불교 사원들도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받으며 모든 사원들에는 통치하는 왕과 왕실을 위한 제단이 있다.

이들 세 체계 가운데 정령 숭배(Spirit Worship)가 가장 오래되었고, 그것이 한국인에게 도입된 시기는 아득한 선사 시대 너머 잊혀졌다. 시간 순으로 그 다음은 훗날 유교에 의해 이름이 붙여지고 아마도 기자에 의해 기원전 1122년에 한국에 도입되었을 망자 숭배이다. 불교는 그보다 1400년 이후(서기 372년)에야 들어온다. 이들 세 체계들은 서로 중첩되거나 상호침투하기 보다는 나란히 존재해왔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일반적인 한국인의 심성에 하나의 어지러운 복합체(confused jumble)로서 유지되고 있다. 유교는 다른 둘 보다는 뒤섞임(adulteration)에서 자유로워 자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교는 한편으로는 유교 윤리를 전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샤머니즘과 제휴를 맺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샤머니즘은 어떠한 정합성이나 선택의 법칙 없이 다른 두 숭배로부터 초자연적인 성격의 것들이라면 뭐든지 다 흡수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인들은 이론적으로는 유교, 불교, 샤머니즘이라는 세 숭배의 성격을 구분하지만, 실제적으로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어지럽고 채 소화되지 않은 가르침과 믿음의 덩어리가 가망 없이 뒤섞이고 혼란스러운 채로 놓여 있다. 한국인은 셋 모두를 믿는다. 그는 개인적으로 유교식 교육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부인이 후사를 위해 부처님께 기도드리도록 보내고, 아플 때에는 무속의 무당과 판수에게 기꺼이 비용을 지불한다. 그래서 평균적인 한국인은 세 체계들의 연합된 도움으로 복된 삶에 이르리라는 희망으로 셋 모두를 따른다.

내가 논의의 주제로 택한 것은 한국인들의 샤머니즘 혹은 정령 숭배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믿음들을 의미한다. 도깨비나 고블린처럼 장난치고 짓궂은 유형부터 영적 세계의 주인인 대장군처럼 높고 힘센 유형까지 분포하는 수없이 많은 영적 존재들에 대한 믿음, 이러한 존재들이 널리 퍼져 있고 자연 세계의 힘과 인간 운명을 좌우한다는 믿음, 이러한 정령들에 대한 충성과 복종, 그리고 그들을 달래는 의식이나 제사가 필요하다는 믿음, 이러한 존재들이 인간을 사로잡아 그를 해하거나 자기들 목적에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믿음, 그들이 많은 인간들 사이에서 초자연적인 일들을 일으키고 미래에 대한 지식이 있어 그것을 드러내어 인간이 하는 일을 돕거나 방해한다는 믿음, 종이, 호리병박, 지푸라기, 항아리, 옷, 돌무더기, 나무, 바위, 개천과 같은 물질적 대상들에 그들이 들어앉아 있다는 믿음, 영의 주물(fetiches)로 성화되는 많은 물건들에 그들이 자신을 대표하는 능력을 부여할 수 있다는 믿음, 이것은 특히 악령에 의해 성화된 그림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모든 구체적인 사실들을 다 집어넣을 수는 없겠지만, 이 정의는 한국 무속인들의 신조들의 대강을 그려준다. 이들 정령들의 성격에 관해서는, 그들이 선하고 인간 삶에 이로운 영향을 행사하는 쪽으로 유도될 수 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악하고, 어느 누구도 최소한 변덕에 의해 인간을 괴롭히는 힘을 갖고 있으며, 그렇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옛 그리스의 ‘다이몬’ 개념에 해당하며, 악령숭배(demonolatry)라는 단어도 이 체계에 사용가능한 이름이다.

악령, 귀신, 도깨비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한국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보편적인 것이다. 아시아에서 이것은 대중의 종교적 믿음의 큰 특징이다. 이것은 연구자들이 횃불과 도끼를 들고서 앞길을 헤쳐 나가야 할 종교 세계의 방대한 지하 영역을 구성한다. 이것은 선사시대적이고, 문헌이 없고 체계가 없으며 종교 해부학자가 어디를 절단하고 분류할 지 정해진 것이 없다는 점에서 종교의 민족적 신앙(ethnic cult)과는 다르다. 이것은 전개 과정에 따라 열대림처럼 무성하기도하고 숨어있는 쥐처럼 어둡기도 하고, 안개처럼 유동적이기도 하며, 혼돈처럼 무형의 것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그것의 역사적 기원을 찾는다면 우리는 길을 잃을 것이다. 중국에서 영, 귀신, 도깨비에 해당하는 한자는 하늘과 상제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한국에서 최초의 고유 역사의 인물인 단군은 만약 존재했다면 무당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우리는 가미-노-미치의 영적인 전설로부터 역사가 시작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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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 정령 숭배자의 신조의 첫 번째 항목은 인간 운명을 좌우하는 수많은 영적 존재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이들 영적 존재 대부분은 사람들의 눈에 어떠한 물질적 대상, 즉 페티쉬로 대표되는데, 이 때문에 페티쉬즘(fetichism; 주물숭배)이 한국 무속의 중요한 특성이 된다. 페티쉬는 무엇이 되었든 한국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특정한 신성으로 뒤덮인다. 정령과 페티쉬는 숭배자의 마음속에서 동일화되어서 무엇이 더 우선성을 갖는지 분간하지 힘들 정도이다. 그러나 페티쉬가 아무리 세월을 통해 타락하고 오염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성스럽고 한국인들은 그것을 함부로 대하기를 두려워한다. 이것은 기독교 개종자에게 비신자 친척들이 오지 말라고 금지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왜냐하면 페티쉬 앞에서 개종자의 존재는 심히 불쾌하고 정령을 화나게 하는 일이어서 집안에 불행이 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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