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독교사자료/만남

수용과 만남

by 방가房家 2023. 4. 20.
그렇다면 우리는 종교문화의 만남이란 본질적으로 하나의 상징/표상과 또 다른 상징/표상과의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그것을 종교문화의 ‘수용’이라고 언표한다면 그것은 다른 ‘우주론’과 ‘신화-논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흔히 사용되는 ‘수용’이라는 개념은 문화 현상의 기술에서는 그 적합성을 승인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수용’에 대칭되는 ‘만남’의 개념이 지닌 함축을 고려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이란 이미 사실 기술 개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기독교를 한 사람의 삶 전체를 관장하는 우주론이라고 생각한다면, ‘기독교 수용’이라는 표현은 참 가볍다. 우주론은 다른 것과의 만남을 통해 서서히 변화하는 것이지 전면적으로 교체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수용이라는 말은 기독교측의 입장을 담고 있는 서술개념이다. ‘받아들임’은 일방향적이기 때문이다.
언뜻 듣기에 ‘수용’ 대신 ‘만남’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좀 의미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거나 나이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구체적인 양상을 지시할 다른 용어가 개발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대안은 떠오르지 않는다. 만남이 학술용어로 적당치 않다는 느낌은 상당부분 우리말을 학술용어로 쓰는 데 대한 어색함에서 기인할 것이다. 사실 영미권 학계에서 서유럽 세계관과 신대륙 사람들의 관계를 기술할 때도 주로 만남(encounter)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수용에 해당하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그렇다면 상징체계의 만남을 서술하는 새로운 언어로 한국 기독교사를 기술하는 일이 과제가 될 터인데 후학들의 논의 진전이 없어 민망할 따름이다. 나 역시 흔히 하는 사회적 배경 설명 이상은 이야기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가톨릭의 전래가 당대의 불우한 지식계층인 남인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졌다고 하는 사회적 현실의 서술이 ‘종교문화’의 만남에 대한 최종적인 진술일 수 있다든가, 국운의 쇠퇴가 빚은 위기 속에서 민족의 자각이 새로움에 대한 열망으로 승화되면서 마침내 그리스도교의 받아들임이라고 하는 사건으로 초래하게 했다고 하는 역사적 진술이 곧 ‘종교문화’의 만남에 대한 규범적인 선언일 수 있다고 받아들인다든가 하는 것은 종교문화의 종교문화다움을 이루는 우주론을 간과하는 것이거나 신화-논리를 단순한 논리로 굴절시켜버리거나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정진홍, “다름과의 만남,” <<하늘과 순수와 상상>> (강, 1997), 91쪽.)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