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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만남

큰 신이 우세하다니까 성당으로 가는 수밖에

by 방가房家 2023. 4. 20.
언젠가 읽은 종교인류학 책에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있었다.
어느 부족에서 현지조사를 하는 인류학자가 있었다. 그는 그 부족의 전통 의학, 다시 말해 무의(巫醫)의 치병의 효과를 굳게 믿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열병에 걸렸다. 며칠을 앓고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그는 부족의 무당을 만나서 부족 전통의 치병 의례를 치루어야 한다고 우겼다. 그는 겨우겨우 무당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를 본 무당은 뜻밖에도 대번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빨리 자동차 불러서 도시에 있는 병원으로 가라고...

그렇게 해서 인류학자는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이다. 언뜻 들으면 허무 개그처럼 들리겠지만, 나에겐 묘한 감동을 준 이야기였다. 자신이 연구하는 전통에 대한 미련할 정도의 신뢰가 일단 감동적이다. 종교인류학 교과서에 이 이야기가 실린 의도는 연구 대상의 신앙을 따르고 그 안에 몰입할 것인지, 아니면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것인지라는 인류학의 고전적인 주제를 논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후자에 무게를 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인류학자의 순수한 애정은 마음에 남는다.


그보다 더 내가 감동을 받은 것은 무당의 태도이다. 지체 없이 병원에 가라고 명령하는 그 태도는 전통적인 굿을 고집하다가 병을 악화시킨다는 무당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를 뒤집은 것이다. 자기가 지닌 전통적 치료의 한계를 인정하고 현대사회에서 병 치료라는 영역이 의료 기관에 넘어갔음을 명확히 인식하는 그의 명령에는, 백인 인류학자에 대한 애정도 묻어 있으면서, 자기 전통에 대한 맹목적 신념까지 교정해주는 현명함이 인상적으로 나타난다. 무당의 무력함을 이야기해주는 자료라기보다는, 무당이 현대 공동체 내에서 지혜의 담당자로서 역할을 바꾸어가며 생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읽은 교회사 자료에서 매우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천주교 쪽 자료인데, 비신자와 결혼 문제에 무당이 묘하게 개입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용정의 이 제오르지오는 가족 중에서 자기만이 교우였습니다. 그의 부친이 외교인 처녀와 약혼을 시켰는데, 처녀 부모가 사위될 사람이 천주교를 믿지 말아야 한다는 단호한 조건을 내놓았습니다... 얼마 동안은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비겁함을 나무라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고, 성교회의 법칙을 내동이치고 맞아들인 여자가 합법적인 아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에 대해서도 냉정한 태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자기 묵주를 감추어 버린 것을 발견한데서 불씨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장인과 장모를 찾아가 “도저히 안되겠으니 당신 딸을 데려가시오. 데려다 무엇을 하든지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데 결혼을 시켰다고 아버지에게 비난을 퍼붓고, 여자쪽 부모들은 약속을 안 지켰다고 야단을 했습니다...
친척 아낙네가 이 일을 무당에게 고하자, 그는 여러 가지 술수를 써보더니 이상한 어조로 “자네가 원하는 대로 수습할 길이 없네. 그런데 혹시 이 젊은이가 큰 신을 공경하는 종교, 즉 예수나 천주의 종교를 따르는 것은 아닌지?”하고 물었습니다. 아낙네가 아니라고 하자, 무당은 “나를 속이는군. 틀림없이 이 젊은이는 큰 신을 공경하고 있어. 아무리 무엇을 해도 그 큰 신에게는 어쩔 도리가 없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같은 말이 젊은이와 아버지에게 전해지고, 서둘러 그의 가족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젊은 며느리는 “큰 신이 우세하다니까 성당으로 가는 수밖에 없군요. 신부님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요”라고 하였습니다.
(“1915년 보고서,” [서울교구연보 2], pp. 132-133.)

이 이야기가 실린 목적은 천주교의 영험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무당이 알아볼 정도로, 혹은 인정할 정도로 천주교 하느님의 권위가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당의 입장에서 이 자료를 읽어보면 이 이야기가 결코 천주교 앞에서 무당의 무력함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가 않다. 무당은 전통적으로 가족이나 사회 공동체의 위기, 즉 맺힌 것을 풀어 유지해주는 역할을 담당해왔고, 이 자료에서도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그리고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비신자인 며느리를 성당에 보내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무당이 충고해주고 있는 것이다. 교회를 가든, 성당에 가든, 절에 가든, 사실 무당이 저어할 바는 아니다. 그저 자신의 단골의 집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종교적 소속에 대해서는 통 큰 태도를 보이는 것이 무당의 입장일 것이다.
하느님을 지칭하는 무당의 언어는 “큰 신”이다. 이미 무속적 세계관에서 기독교신을 설명하는 언어는 마련되어 있다. 마귀니 잡신이니 하는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범주로 처리된 것이 아니라 조화와 공존이 가능한 체계로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큰 신이 우세하다”는 며느리의 대사는 외견상 무속의 패배이지만, 실제로는 무속의 세계관으로 기독교를 해석하는 공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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