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스트로스는 신화에 관한 한 논문에서 “신화의 번역”이라는 주제에 관련하여 유명한 언급을 남겼다.
시는 심각한 손상을 입지 않고서는 번역될 수 없는 종류의 말이다. 반면에 신화의 신화적 가치는 가장 졸렬한 번역을 통해서도 보존된다.
(Levi-Strauss, [Structural Antropology], p.210.)
얼마 전 내 책장에 있는 해적판 신화집들을 정리했다. 번역자 이름도 없고, 대부분 서투른 영역일 그 책들을 버렸는데, 레비-스트로스의 말에 따르면 버려서는 안 되었던 모양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언급은 다소 대담하다. 그는 인류 정신의 보편성을 상정하고, 그 보편성이 신화를 통해서 표현된다고 보기 때문에 그런 언급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신화의 번역 가능성에 대한 그의 과도한 신뢰는 역시 논란거리가 된다.
종교학자 웬디 도니거(Wendy Doniger)는 레비-스트로스의 언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향수가 바람에 실려 전달되듯이, 신화는 언어에 실려 전달된다.
(Wendy Doniger, [Other Peoples' Myths], p. 41.)
여성 학자다운 섬세한 멘트이면서도 요령있게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는 말이다. 향수가 전달되면서 자신의 본체를 조금씩 잃어가듯이, 신화가 전달될 때도 그러한 손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말을 뒤집어 얘기하면, 신화에는 아무리 훌륭하게 번역해도 옮겨지면서 상실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라는 이야기이다. 성서가 히브리어와 그리스에서 라틴어로 옮겨질 때, 또 영어로 옮겨질 때, 그리고 한국어로 옮겨질 때, 최종적으로 현대 한국어로 옮겨질 때, 원어가 갖고 있는 의미들과 성스러운 분위기들은 불가피하게 망실된다. 잃는다기보다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될 텐데, 어쨌든 원래의 것이 변형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꾸란은 번역될 수 없다는 이슬람교의 원칙은 유명하다. 미국에는 구닥다리 영어 번역이 킹제임스 버전만이 진짜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인 집단이 있고, 심지어는 그 주장을 맹신하는 한국인들 그룹도 있다. (그래서 “한글판 킹 제임스 성경”이라는 “번역”을 내어 진짜 성경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개신교인들이 새로운 번역을 받아들이지 않고 일제 시대 번역인 개역 성경을 아직도 고집하고 있는 것도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들의 주장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지만, 번역은 원래의 성스러운 의미의 변형을 가져온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해가 불가능한 주장들은 아니다.
종교의 언어, 신화의 번역은 순전히 언어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일단 번역이라는 말의 범위가 넓어질 수도 있다. 신화가 그림, 음악, 영화, 광고 등 다른 형태 안에 담기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옮김”이요 번역이라고 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일리아드가 트로이라는 영화 형식으로 옮겨지는 것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번역이다.
번역이라는 말을 좁게 보는 경우에도, 종교 언어의 중요한 특성 때문에 번역의 문제는 남는다. 신화는 제의와의 밀접한 연관성 속에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종교의 언어는 종교적 실천을 통해서 자신의 의미를 유지한다. 그러기에 의례를 벗기고 언어만 달랑 옮기는 번역은 다른 의미 체계의 생성일 수밖에 없다. 도니거의 다음 언급은 그러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신화의 키취는 우리를 위해 손상된 것일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제의의 옷을 발가벗기운 채 우리에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Wendy Doniger, [Other Peoples' Myths], p. 144.)
나는 류시화의 책들을 별로 읽어보지 않아서 섣불리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옮긴 인도 신화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그의 작업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 우리 사회에 매우 필요한 작업을 해주고 있고, 그래서 많은 한국인들에게 정서적 울림을 주는 저작들을 계속 발표하고 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의 번역을 통해서 우리가 만나는 것들이 “우리 속의 인도 이야기”이거나 “우리 안의 인디언”일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서 새로이 구성된 의미 체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