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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메모

흄, <기적에 관하여>

by 방가房家 2023. 4. 19.

종교학의 시작을 어디에 놓는지는 학사를 기술하는 학자의 입장에 따라 다르다. 일반적으로는 막스 뮐러를 종교학의 아버지로 놓는다. 우리나라에도 이 입장이 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종교학의 기원을 그 이전의 계몽주의 시대에 놓는 입장도 심심찮게 보인다. “Explaining religion”이라는 종교학사 책은 데이비드 흄으로부터 종교학사 서술을 시작한다. 자신을 계몽주의자의 후예라고 공공연히 천명하는 조나단 스미스의 입장도 그러한 종교학사 이해를 보여주는 것 같다.


전통적인 종교학사의 입장은 19세기 말, 비기독교 세계의 자료들이 홍수처럼 유럽에 밀려들어온 상황에서 비교종교학적 연구가 요청되었던 것을 종교학 탄생의 중요한 계기로 보고 있다. 연구 태도의 변화도 매우 중요하지만 이른바 “자료”의 문제도 함께 중요시된다. 그 시기가 사회학, 인류학 등이 태동한 것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근대 학문으로서의 종교학의 성격이 강조되고 있다. 반면에 계몽주의 학자들을 출발점으로 볼 때는, 종교에 관한 글이 신학의 그늘을 벗어나기 시작한 “태도”의 변화에 주목하는 것 같다. 종교를 말하면서 신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신을 믿는 “인간”에 대한 탐구로 선회한,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싸가지 없는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을 종교학의 시작으로 본 것이다. 종교학이 인간에 대한 탐구임으로 강조하는 학자들에게는 데이비드 흄을 비롯한 계몽주의자들의 주장이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흄의 [기적에 관하여]는, 매우 거칠게 말하면, “기적은 거짓부렁이다”라고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기적의 증거는 불충분하며 참된 종교의 기초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한 글이다. 하지만 기적의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주된 내용 이외에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인간에는 종교를 희구하는 본성이 있으며 그것이 계속 지속되리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서술에서 종교학이 인간에 대한 탐구임이 뚜렷이 제시되고 있고, 지금 우리가 종교적 인간(homo religiousus)라고 부르는 종교학의 전제가 확립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모든 민족들의 건국역사들에서 전쟁, 혁명, 기근, 죽음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자연적인 원인들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적, 예언 신탁, 심판 등이 바로 흔치 않은 자연적인 사건들을 이상한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점점 계몽됨에 따라 우리는 개국 역사에는 기적적이거나 초자연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고, 기적적이거나 초자연적인 것들은 신비한 것을 향한 인류의 일상적인 성향에서 야기된 것이며, 이 같은 성향이 식견과 학식을 통해 종종 제어받기는 하지만 인간 본성에서 철저히 근절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데이비드 흄, 이태하 옮김, [기적에 관하여](책세상, 2003),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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