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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메모

메노키오 노인의 기독교 -"치즈와 구더기"에서

by 방가房家 2023. 4. 19.

“모든 것이 혼돈이었습니다. 흙, 대기, 물, 불이 함께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었고,
우유로부터 치즈가 만들어지듯이, 거기서 벌레들이 생겨났는데, 그 벌레들은 천사였습니다.
신성한 권위에 의해 하느님과 천사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은 천사였고, 하느님 역시 계시었는데, 그 역시 그때 동시에 그 덩어리로부터 창조된 것입니다.
그는 왕이 되어 네 대장, 루시퍼, 미가엘, 가브리엘, 라파엘을 거느렸습니다.
.....................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는 하느님의 자녀들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분은 우리들과 동일한 본성을 지녔는데, 다만 더한 위엄을 지녔을 뿐입니다. 마치 교황이 우리와 동일한 사람인데 권력을 지녔기 때문에 보다 높은 등급의 사람인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Carlo Ginzburg, The Cheese and the Worms, p.6)

위의 이야기는 16세기 이탈리아 한 촌마을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가 생각했던 천지창조와 예수론이었다. 종교개혁 당시 돌아다니던 종교 서적들로부터 주워들은 주장들이, 이 노인네가 갖고 있던 세계관과 융합되어 기독교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빚어내었던 것이다. 이 시골 노인의 머리 속에서 농촌의 전통적(따라서 이교적인) 세계관이 당시 식자들의 개념들과 어떤 식으로 반응하였는지를 정교하게 추적하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이 책은 [치즈와 구더기]라는 좋은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이탈리아 원본에서 직접 번역한 만큼, 좋은 번역이리라 기대된다.)
이 이상한 기독교론 때문에, 노인은 종교재판소에서 긴 시간동안 재판을 받게 된다. 처음에는, 높으신 분들에게 자기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는데 신이 났던지, 자기 얘기를 또박또박하던 이 노인, 나중엔 초죽음이 되어 항복해 버린다. 그리고 그 결과는, 1599년에 집행된 화형이었다.
중간 내용 다 생략하고 이 노인에 대한 판결 내용을 보자. 종교재판관들은 처음 들어보는 노인의 얘기에 무척 당혹해 했던 것 같다. 물론 이들은 노인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만, 다른 세계관에 의해 재구성된 노인의 "표현하기조차 힘든" 기독교관을 기존에 알려진 이단들의 범주 속에 짜맞추어 넣는 일이었다.

“우리는 메노치오가 단지 한 전형적인 이단이 아니라 이단의 괴수라고 결론내린다...
너는 거의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이단의 부패에 이중삼중으로 빠져 있다.
너는, 세상 만물이 생성된 영원한 혼돈(chaos)이 존재한다는, 어느 고대 철학자의 금지된 의견을 강하게 긍정하였다. 너는 선과 악의 이중적 생성에 관한 마니교의 가르침을 부활시켰다. 너는, 유대인, 투르크(이슬람교도), 이교, 기독교인, 그리고 모든 불신자 등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성령이 그들에게 모두 주어졌다는, 오리게누스의 이단을 되살렸다...”
(Carlo Ginzburg, The Cheese and the Worms,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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