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쿠레 기리시탄(かくれ キリシタン)이란 '숨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의 일본어이다. 16세기 천주교가 일본에 전래된 이후 200년이 넘게 일본 정부는 천주교를 금지한다. 그 혹독한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일단의 천주교인들이 있었는데, 자신의 신앙을 숨기기 위해 성모상 대신 (십자가를 뒤에 새긴) 관음상을 사용하는 등 은폐의 방법을 사용한다. 그런데, 대를 이어 숨겨 온 이들의 신앙은 점차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 갔고, 후에 천주교가 공인된 이후에, 이질감으로 인해 그들은 천주교회로 복귀하지 않는다.
상당히 특수한 사례이다. 이 사례는 종교적 실천과 이념 체계가 어떠한 상호 관계를 갖는지, 어떻게 서로를 변형시키는지를 잘 보여준다. 흔히 의례는 이념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같은 이념을 지니면서 다른 의례를 행하는 상황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의례가 다르면, 그것은 다른 종교이다. (사실 내 석사 논문이 은연중 말하고 싶었던 명제이기도 한데, 너무나 희미하게 깔려 있을 뿐이다) 다음은 박규태 선생님의 책에서 메모해 놓은 내용이다:
박해가 진행되면서 조직 간 연락이 두절되고 고립될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여기서 이른바 '가쿠레 기리시탄(숨은 기독교인)'이 생겨나게 되었다. 기쿠레 기리시탄은 에도시대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까지도 존속했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재래의 민간신앙과 혼합되는 한편, 검거망을 피하기 위해 성화와 의례 등을 불교나 신도의 것으로 대체함으로써 원래의 기독교 신앙과는 다른 형태의 일본적 기독교로 바뀌었다. 가령 성모 마리아상이 불교의 관음보살상이나 민간신앙의 귀자모신(鬼子母神)상의 형태로 변한 것은 그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세계 기독교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 일본 특유의 기독교 신자들은 표면상 불교사원의 단카(가정 예배당)이므로 장례식때는 승려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교식 장례가 끝난 후에는 관에서 불구를 제거하고 다시 기독교식 장례를 거행했다. 에도 후기에 가톨릭이 다시 일본에 들어오자 많은 가쿠레 기리시탄들이 속속 교회로 복귀했지만, 서구적인 가톨릭 의전에 적응하지 못해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박규태, [아마테라스와 모노노케 히메까지 -종교로 읽는 일본인의 마음], 책세상, 2001, pp.113-114.)
히라가와 스케치로의 [마테오 리치](798-801)에서 기쿠레 기리시탄에 대해 상세히 소개한 부분이 있어 옮겨 놓는다. 저자는 후루노 세이진의 [은거 그리스도 신자]라는 연구서를 인용하고 있다. 원전을 찾아 확인할 길도 능력도 없지만, 스케치로의 소개만으로도 흥미로운 내용들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1. (일본 개항 직후) 파리 외방선교회의 프티장 신부는 나가사키에서 오우라 성당의 건설을 추진하고 1865년 2월 19일에 그 헌당식을 거행했다. 그런데 3월 17일 점심 때 어딘가 모습이 다른 농부 십여명이 이 프랑스 절이라고 불리는 성당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중 한사람이 프티장 신부에게 '성 마리아 상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으면서 자신들은 당신들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말을 했다.
(이 사건은 서양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화제의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다. 이백년 이상의 박해 속에 살아남은 기독교 신앙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2. 아마쿠사 지방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불(異佛, 불교 이외의 신을 나타내는 상)의 성상숭배와 기도문을 보면 관음 모자상을 숭배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또한 조사일기라고 불리는 관리의 심문 기록을 보아도 몰수한 이불 중에는 관음모자상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한다. 이는 은거 그리스도교 신자가 성모상을 숨기기 위해 관음 모자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일본에 전해져 오는 관음 신앙의 연장선상에서 마리아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상의 모습만 보아도 양자는 일정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실을 개혁할 수 없었던 가난한 농부들이 저 세상에서 아미타의 정토를 구하며 타력 본원에 기댔던 것처럼, 아마쿠사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마리아에게 기대며 '천국=극락'의 지복을 원했음이 분명하다... 이키즈시마에 사는 은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어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만을 숭배한 것이 아니라 성인과 그것에서 순교한 사람들을 신으로 받들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그리스도교에서 다신교적인 색채가 저절로 나타난 것은 일본인에게 원래 죽은 사람을 존경하는 관습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조상의 영혼을 존경하는 경건함이다... 나가사키에서 순교한 성인의 상이 조각되고 이들에게 감사하는 것 또한 고생한 조상을 그리워하는 기분에 호응하는 무잇인가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3. 은거 그리스도교 신자의 대부분은 그리스도교를 받드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꾼 조상숭배를 행해왔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교회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 감정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만 부모로부터 전해오는 신앙을 묵묵히 지키려 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교는 무엇보다도 집안의 종교이다. 그것은 집안에서 전해오는 것을 이어받은 종교이다. 게다가 조상들이 피투성이의 수난으로 지켜온 종교이다. 그 조상들의 고난을 생각하면 이것을 결코 버릴 수가 없다.
다음은 가쿠레 기리시단과 직접 관련된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지만, 일본에서 성서가 구비전승으로 전해진 매우 특이하고도 소중한 예이다. 그 전승을 통해 그 지역 일본인들에게 의미있게 받아들여진 것이 무엇인지가 확연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음의 채록된 신화는 창세기 기사와 동아시아 지역에 널리 분포된 남매혼신화소(우리나라에서도 이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있다)와의 혼합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일본 나가사키 지방의 전승이다.
사람의 조상 아담과 하와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오누이였다. 오빠는 누이가 그리워지고, 누이는 오빠가 그리워져서 힘껏 소리를 질러 서로를 불렀다. 골짜기 아래에 있을 때는 하늘을 향해, 높은 데에 있을 때에는 골짜기를 향해서, 그리고는 '무서운 길을 알게 되어' 쌍둥이만을 열두 배나 낳았다. 이러한 일이 있어 근친의 결혼은 좋지 않다고 했다.
인구가 늘어나자 욕심이 생기고 나쁜 일(惡事)이 많아졌다. 그래서 섬에 있는 시시고마(馬形)의 눈이 빨간 색이 될 때 해일이 이 세상을 멸망케 할 것이라고 하느님이 경고했다. 이것을 들은 젊은이가 그런 우스운 일이 어디 있겠냐고 그 눈에 붉은 칠을 해버렸다. 그러자 지체없이 큰 물결이 천지를 뒤엎을 듯 밀려와서 섬 사람들은 모두 죽고 오직 한 가족만이 미리 마련해놓은 통나무 배를 타고 판자와 국자로 물을 저으며 '만이가시마(萬里島) 나와라', '이리오우시마(有五島) 나와라'하고 소리질렀다. 그랬더니 희미하게 이리오우시마가 보여 그것을 목표로 하여 힘을 다해 저어나갔다.
( 이 글은 숨어나는 기독교인의 신화집이라고 할 수 있는 [天地始之事]에 기재된 것으로, 김헌선, "한국과 유구의 창세신화 비교연구", [세계의 창조신화].에 번역된 것을 옮겨 쓴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