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변잡기

미국 애들의 지도 숙제

by 방가房家 2023. 4. 18.

(2004.9.7)

세계의 종교들이라는 대형 강의의 과제물들을 처리하는 중이다. 종교와 관련된 지명 20 곳이 현재 어느 나라에 있는지 찾고, 세계 지도를 그려 위치를 표시하는 간단한 과제물인데, 학생 수가 많아 처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 처음에 이 숙제를 보았을 때 의아했다. 다소 낯선 지명들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래도 찾아보면 다 알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지도책 들춰보거나, 구글 검색하면 다 알 수 있는 이런 걸 숙제로 내다니... 더구나 선생은 도서관 어느 열람실을 가면 지도를 이용할 수 있으며, 일요일에는 문 닫는다고 친절하기 그지없는 설명을 과제에 명기해 놓았다. 아마도 학생들에게 보너스 점수를 주려고 만든 과제인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제물을 받고 보니 과제물의 성격이 내 생각보다 진지한 것임에 놀라게 된다. 우선 얘네들이 참 열심히도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 애들이 세계 지도에 익숙치 않다는 점에 착안한, 꽤 노력을 요구하는 과제였던 것이다. 당연히 대부분 만점일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다. 덕분에 미국 애들의 엉터리 지리 감각을 구경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대학 학부 수업같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첫번째 이유는 우리나라 애들의 지리 상식이 더 풍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두번째 이유는 우리 같으면 이런 과제가 주어질 때 거의 동일한 답안을 내어놓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개인별로 과제가 주어지더라도 학생들 사이에서 과제를 위한 조직화가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연대감을 바탕으로... 단적으로 말해 공부 잘하는 애 것 하나 받아 베껴서 제출하는 일이 잦다. 밥먹고 놀러다니는 동아리가 연구 단위로 탈바꿈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최소한 전화를 걸어 친구 것과 비교하고 고치는 일은 한다. 요즘같으면 아예 싸이월드에 클럽을 만들어 정보를 공유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환경이니 여간한 무관심이나 고집 아니면 정답에 맞추는 게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굳이 베끼는 것까지는 아니라도, 의견을 묻는 문제도 아니고 지식을 묻는 건데, 정답 만드는 거야 누워서 떡먹기이다. 미국 애들도 그런 짓을 많이 하지만, 대다수는 그냥 혼자 하는 것 같다. 정답을 만들어내는 누워서 떡먹기를 하지 않고 우직하게 혼자서, 그리고 열심히, 정답이 아닌 자기의 엉터리 답을 만들어 내는 것이 여기 애들이다. (여기엔 온라인 테스트라는 게 존재한다. 정해진 시간 내에 사이트 접속해서 문제 풀면 점수 나오는 시험이다. 여럿이 모니터 앞에 모여 문제 풀어도 발각될 염려가 없는 시험이다. 이런 제도가 유지되는 것은 미국애들의 곰탱이같음때문이리라...)
참고로 과제에서 제시된 지명들은 다음과 같다. (익숙치 않은 지명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수업 중에 언급된 지명들이고, 선생이 남아시아 종교 전공이라 그쪽 이름들이 많다.)
Please find these places, rivers and mountains:
 
COUNTRY (Use the modern or ancient name, but indicate which one you are using!)
1. Adam's Peak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Amritsar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Ayers Rock (Uluru)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 Baboquivari Peak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5. Borobudur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6. Cuzco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7. Dwarka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8. Ganges River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9. Ife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0. Indus River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1. Jerusalem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2. Karbala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3. Kyoto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4. Mecca & Madina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5. Mohenjo-Daro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6. Mt. Chung-nan Shan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7. Mt. Kailas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8. Mt. Sinai (Jabal Musa)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9. Tenochtitlán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 Varanasi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실수의 사례들을 좀 언급해 보겠다.
지역과 국가를 구분하지 않는 일이 있다. 보로부두르 사원은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있는데, 과제는 국가 이름을 명시하는 것이기에 그냥 자바라고 쓰면 점수가 좀 깍인다. 자바를 나라 이름으로 쓴 애들이 꽤 있다. 카일라스 산은 티벳 지역에 있는데, 나라 이름을 중국으로 쓰지 않고 티벳으로 쓴 애들이 굉장히 많다. 달라이 라마의 유명세 때문에 그런지, 티벳을 독립된 국가로 여기고 심지어 지도에 티벳 국경을 그려 넣은 애들도 있다.


(마다가스카르와 스리랑카를 혼동한 지도)

아담의 봉우리는 스리랑카에 있는 곳이다. 스리랑카를 그냥 인도라고 생각한 애들이 좀 있었고, 가끔 지도상에서 스리랑카를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와 헷갈리는 경우가 있었다. 섬나라라는 단 하나의 공통점 때문에 헷갈리는 것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지역들이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어느 것이 수업 시간에 언급된 것인지 확인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생긴 실수들이 있다. 메카와 매디나는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는 대표적인 이슬람 성지이다. 그런데 서아프리카에도 매디나라는 곳이 있나 보다. 그래서 엉뚱하게도 지도에서 매디나를 아프리카에 표시해 놓은 애들이 꽤 있었다. 더 황당한 예는 시나이 산이다.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에 있는 산인데, 미국 오하이오주에 그런 산이 있나 보다. 시나이 산을 미국에 그려놓은 것을 보고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시나이 산과 관련해 간과하고 지나갈 수 없는 실수가 시나이 산이 이스라엘에 있다고 한 경우이다. 중동전쟁 때 시나이 반도가 이스라엘에 점령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지금은 반환되어 엄연히 이집트의 영토이다.
1학년들이 주로 듣는 수업이다 보니 별별 녀석들을 다 보게 된다. 이 과제는 그냥 종이 한 장에 나라 이름 쓰고, 다른 한 장에 세계지도 그려 표시하면 충분하다. 그런데 몇몇의 숙제는 가관이다. 커다란 전지에 커다란 지도를 그려 온 애, 아예 하드보드지에 지도를 그려 짊어지고 온 녀석, 큰 지도를 그려 둘둘 말아왔는데 고무 밴드가 없다고 자기 머리끈을 풀러 두루마리를 묶는 여학생, 색종이로 정성스레 세계의 성지를 붙여온 애들, 나라별로 그림을 그려 지도책으로 묶어 온 애. 마치 학예회를 하듯 해왔다. 대다수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몇 애들 하는 걸 보면 초등학교 분위기다. 물론 그런 정성은 점수로 반영되지 않는다.


(큰 전지에 연필로 무성의하게 그린 지도.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유독 미국과 멕시코는 열심히 그렸다.)


(열심히 오려붙이고...)


(세계 지도를 그린 걸로 성에 안 차, 나라들을 색색별로 다시 그리기도 한다. 정성이 뻗쳤다....)
기억에 남는 엉터리 지도가 둘 있다. 하나는 큰 종이에 온갖 색깔로 그린 지도인데, 도저히 현대 지도를 그린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마치 16세기 선교사의 지도를 보는 것 같다. 아메리카와 유럽이 거의 옆에 붙어 있다. 아라비아 반도는 표현되어 있는 것 같은 데 인도에 해당하는 곳은 없다. 문제 중에 교토가 있기 때문에 일본을 표시해야 하는데, 일본이 어딘지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인도네시아인지, 일본인지, 아니면 필리핀인지 식별하기 힘든 섬들이 떠있을 뿐이다. 물론 한반도는 있을 턱이 없다.
다른 엉터리 지도는 종이에 연필로 갈기듯이 그린 지도였다. 흉칙한 세계 지도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여기저기 지명을 열심히 표시해 놓았다. 그 지도에서도 아시아가 특히 엉망이었고 한반도는 없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일본을 인도차이나 반도 옆에다 그려 놓았다. 놀라운 것은 인도차이나 반도 중간에 금을 그어 놓고 위아래에다 "N. Korea"와 "S. Korea"라고 각각 써 넣었다는 것. 이 과제에서 한국을 표시할 필요는 전혀 없는데, 왜 이 친구는 공연한 짓을 해서 내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까. TA가 한국 사람이라는 걸 알기나 했을까... 이 두 지도를 사진 찍어 놓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