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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잡기

올림픽 단상

by 방가房家 2023. 4. 18.

(2004.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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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올림픽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힘들었다. 여러 미국 방송사 중에서 NBC에서만 올림픽을 독점 중계하고, 다른 채널에서는 언급조차 듣기 힘들다. 우리에겐 9시 뉴스 첫머리를 금메달 소식으로 하는 게 당연하지만, NBC가 아닌 다른 방송국의 경우, 이런 일은 절대 없다. 평소 하던 대로 30분 동안 동네 얘기와 일기예보를 전달한 다음에, 이후의 스포츠 소식에서는 메이저리그, 농구, 미식축구 얘기 다하고나서 짤막하게 올림픽 메달 소식 들려준다. 올림픽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우리의 꼴지팀 애리조나의 야구 경기 중계를 어김없이 즐길 수 있다. 어제 어느 토크 쇼에서는 왠 남자가 나와, “Olympic sucks," "Paul Hamm sucks." 이런 얘기를 떠들어댄다. 올림픽이라는 대사건 앞에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미국이 큰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야 1980년대에 올림픽에 국운을 걸었고, 그 이후로도 온 나라가 올림픽 체제로 전환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문자 그대로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쏠려 있는 상태가 2주간 지속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올림픽을 주제로 대화 한 번 나누어본 적이 없다. 올림픽은 스포츠라는 한 “분야”의 사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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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올림픽은 첫날 사격으로 시작해서, 유도, 레슬링, 탁구, 배드민턴, 역도, 핸드볼, 양궁, 태권도...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행사였다. 그러나 이번 올림픽 때, 나는 이런 종목들 구경도 못해보았다. 미국의 시선으로 바라본 올림픽은 완전히 다른 내러티브로 구성된다는 것을, 예상은 했었지만,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수영, 비치 발리볼, 체조, 농구, 육상 등의 종목들만 있는 올림픽, 나중엔 좀 적응되었지만, 맥빠진 올림픽임에는 틀림없다. 올림픽에서 태극기 구경은 좀처럼 할 수 없었다. 나는 한국이 금메달을 따면 세계에 알려진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이라면 올림픽 백번 해도 미국애들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잘 모를 것이다. (내가 얼마나 순진했던가. 올림픽은 세계를 아는 창구가 아니라 자기 나라를 열호하는 확성기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나 이번 올림픽에서는 예외가 있었다. 바로 남자 체조였다. 원래 미국의 카메라는 열심히 자국의 선수와 라이벌이 될만한 선수들을 좇는다. 체조 중계에서, 처음에 한국 선수들은 화면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럴 가치가 없었다고 판단된 탓이다. 성적 랭킹에서는 한국 선수 두 명이 이름이 상위에 올라있지만, 플레이하는 모습은 볼 수 없는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마지막 라운드가 되자 카메라는 마지못해 그 때 1등을 달리고 있는 양태영을 처음으로 보여주기 시작한다. 나에겐 그 때가 가장 짜릿한 순간이었다. 미국 방송의 예상에는 전혀 들어있지 않던 이들이, 자기 실력을 통해 화면에 자기 얼굴을 들이미는 순간이었다. 폴 함의 연기가 있기 전, 한국 선수들의 두 편의 연기를 보았을 뿐이지만, 그것으로도 너무 좋았다. 너무 좋았던 나머지, 이들이 은, 동으로 떨어져도 전혀 개의치 않고 그들의 성과가 자랑스러웠을 뿐이었다. (이건 보통 한국인들과는 괴리된 정서임에 틀림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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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미국 찬가만 듣다 보니, 약간은 비뚤어진 시선으로 경기를 보게 된다. 최근에 중계를 보면서 흥분한 일이 두 번 있었다. 한번은 미국의 드림 농구팀이 아르헨티나에게 깨진 것. 또 한 번은 최강의 달리기팀인 미국 여성 계주조가 400m 이어달리기에서 바톤 릴레이를 제대로 못해 탈락하고 자메이카가 우승하였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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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와서 놀란 것이, 모든 사람들이 어쩜 그리 떠들기를 좋아하고 잘 하는지...
모든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잘도 한다. 일상 생활에서도 실감을 많이 하지만 방송에서도 그런 걸 많이 느낀다. 미국의 뉴스에서는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의 인터뷰가 꼭 들어간다. 불난 집의 옆집 사람이 나와 몇 시에 어떤 식으로 불났는지 말하는 건 기본이다. 캘리포니아 산불 때 환호하며 불구경하고 비디오로 불장면 녹화하다 기자한테 걸린 녀석도, 그 쪽팔린 상황에서 생전 이런 거 처음 본다고 신나게 떠벌린다. 아이가 유괴당한 어머니나, 심지어 살인 사고를 당한 아이의 어머니까지, 우리라면 실신해 있어야 할 텐데, 눈물을 흘리면서도 또박또박 할 얘기 다 한다. 그러니까, 체포당한 범인을 제외한 사건의 핵심 제보자들이 다들 인터뷰를 한다. 물론 경찰들도 인터뷰에 응하고.

이런 신기한 일은 올림픽 때도 일어났다. 경기 마치고 휙 가버린 선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무조건” 주절주절 이야기를 한다. 그것도 경기 끝난 직후이다. 금메달 딴 수영 선수는 풀 장에서 나와 탈의실 들어가기 직전에 멈춰서서 기쁘다는 이야기를 한다. 은메달 딴 녀석도 마찬가지의 이야기를 하고, 꼴찌한 녀석은 다음에 잘 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수영복 입은 채 즉석에서 떠드는 이야기이다. 체조선수도 마찬가지로 점수 발표되는 즉시 뭐라뭐라 떠든다. 달리기한 녀석은 숨을 헉헉 내쉬면서도 신나게 떠든다. 마치 인터뷰하기 위해 달려온 녀석같다. 당연히 금메달 딸거라고 생각하다가, 바톤을 제대로 전달 못해 떨어진 여자 달리기 계주조도 바로 인터뷰를 해서, “우린 그래도 열심히 했고, 이 훌륭한 동료들과 연습한 순간이 행복했다”는 이야기를 죽 늘어놓는다. 말하느라 울 시간이 없다. 어찌 그렇게 감정 정리하고 이야기로 넘어가는 동작이 빠른지...
기쁘던 슬프던, 어떤 상황에서도 이야기하는 것이 이쪽 문화다. 슬프면 슬프다고 이야기하는 거지, 슬프다는 감정이 북받쳐 말을 할 수 없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애들이다보니, “말하지 않는” 우리 선수들이 참 이상하고, 불친절하고 오만한 것으로 보인다 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것이다. 가끔 한국 선수의 매너를 탓하는 기사를 보게 되는데, 이건 문화에서 오는 거다. 우리 입장에서야, 운동선수는 일반적으로 운동만 죽어라 했고, 그리고 기분이 안 좋으니 말 좀 안하고 못한다 해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오히려 인터뷰를 잘 하면 말“까지” 잘한다고 대견해 할 것이다. 그러나 서양 기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곳에서 인간은 “말하는 동물”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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