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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잡기

애(아)리조나 카우보이

by 방가房家 2023. 4. 18.

애리조나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주변 어른들에게 말씀을 드릴 때, 때론 미묘한 표정을 만나곤 하였다. 난감한 표정을 감추며 ‘그래도 미국인데...’라는 생각으로 무마하고 계시는 표정이었다.


한국 사람에게 애리조나는 어떤 곳일까? 친숙한 곳은 아니되, 완전히 낯선 곳도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몬태나, 혹은 와이오밍 주에서 공부한다고 말하면 그런 지명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적 울림은 전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애리조나에 대해서는 어떤 느낌이나마 있는 걸 보아서는 한국인의 지리적 인식 속에서 약간의 땅뙈기나마 지분이 있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에게 애리조나는 김병헌 덕분에 익숙한 지명이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김병헌이 다이아몬드 백스 구단에서 활동하며 월드시리즈에 올라가고 하는 바람에, 애리조나라는 이름이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 야구팬들 역시 “킴”을 잊지 못한다. 야구팬 입장에서 복장터지게 하는 구원투수야말로 애증의 대상이다. 내가 롯데 자이언츠 투수 강상수를 잊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심리랄까.)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메이저리그 구단의 겨울 캠프가 많이 꾸려지는 곳이고, 혹자는 박지은이 골프 유학을 온 곳이 애리조나라는 것을 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국인에게 애리조나의 이미지는 황량한 곳이다. 애리조나에도 나름대로 지리적 다양성이 있다. 남쪽은 전형적인 사막이지만 북쪽은 고원지대이다. 남북의 해발고도 차이가 상당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이런저런 풍경이 나타난다. 애리조나 북쪽에는 그 유명한 그랜드 캐년이 있다. 그러나 그랜드 캐년과 애리조나를 연결지어 인식하는 한국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차라리 관광 패키지인 라스베가스와 그랜드 캐년을 묶어 생각할지언정. 그렇게 연결이 안 되는 데에는 애리조나가 황무지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어떤 계기로 애리조나라는 곳이 한국 사람의 지리적 인식 속에 황무지로 편입하게 되었을까? 그 계기가 되었을 법한 것으로,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이 60년대 노래인 “아리조나 카우보이”이다. 그 이른 시기에 미국 변방의 한 주가 한국 대중들을 위한 문화적 재료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던지...


제목 :아리조나 카우보이 / 가수 :명국환 / 김부해 작사 전오승 작곡

 

 

카우보이 아리조나 카우보이
광야를 달려가는 아리조나 카우보이
말채찍을 말아들고 역마차는 달려간다
저 멀리 인디안의 북소리 들려오면
고개 너머 주막집에 아가씨가 그리워
달려라 역마야 아리조나 카우보이
카우보이 아리조나 카우보이
광야를 달려가는 아리조나 카우보이
몰아치는 채찍아래 역마차는 달려간다
새파란 지평선에 황혼이 짙어오면
초록포장 비춰주든 조각달만 외로워
달려라 역마야 아리조나 카우보이

전형적인 이국풍의 노래이다. 영락없이 서부 영화가 유행하던 시절에 상상된 한 풍경이다. 애리조나가 한국인의 상상적 지리 속에서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노래를 보면 도대체 작사가의 머릿속에서 교차한 문화적 요소들이 무엇이었는지가 궁금해진다.

1. 애리조나는 그저 지나가는 곳이다. 황량함과 외로움의 정서가 지배하는, 한마디로 살 곳이 못된다. (그냥 황무지로 선택된 것이다. 대신 뉴멕시코가 되었든, 네바다가 되었든 상관이 없을 것이다.) 나야 개인적으로 찬성하지 않는 정서지만, 그렇게 느끼는 사람도 있는 것 같고, 정서의 문제는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자.

2. 카우보이는 애리조나와는 원래 본질적인 상관이 없다. 카우보이는 텍사스 쪽에 주로 살던 애들이고 그 쪽 동네 상징이다. 그래서 유명한 미식축구 팀 이름이 “댈라스 카우보이”이다. 물론 적지 않은 수의 카우보이가 서부 개척 때 애리조나에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애리조나와 카우보이가 본질적인 연관이 있는 것처럼 노래된다는 것. 가사에서 애리조나는 단 한번도 카우보이라는 단어와 떨어져서 등장하지 않는다! (애리조나는 카우보이 영화의 생산지이기는 하지만 카우보이의 생산지는 아니다.)

3. 나한테는 오히려 애리조나와 아메리카 원주민을 연결시키는 게 더 자연스럽다. 이 곳은 미국에서 인디언들이 그나마 가장 많이 살아남아 있는 곳이다. 다행히 노래에서도 인디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저 멀리 인디안의 북소리 들려오면...” 이 분위기는 묘하다. 원래의 의도는 필시 애리조나 땅이 충분히 순치되지 않은 야만의, 위협이 상존하는 공간이라는 걸 부각시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뒤의 가사와 맞물려 인디언의 북소리는 향수를 유발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북소리... 동양적 정서마저 느껴지는 이 소리를 통해 인디언과 우리의 정서적 유대감을 상상한다면 지나친 것이 될는지...

4. 이 노래의 압권은 “고개 너머 주막집에 아가씨가 그리워”라는 가사이다. 주막집이라는 기가 막힌 토착화를 통해 애리조나는 한국적인 공간이 된다. 이 한 단어 때문에 나는 이 노래에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부연하자면, “고개 너머”라는 묘사도 한국적인 지형 인식이지 애리조나에 꼭 부합하는 것 같지는 않다.

5. 애리조나 북부를 관통하는 66번 길(Route 66)은 서부 개척을 위한 대표적인 길이었다. 주막집(?)이 있는 작은 도시들도 길 주변에 몇 개 있다. 이 노래는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다.
(“Arizona”를 표기하는 데에는 아리조나와 애리조나가 혼재되어 있다. 나도 솔직히 어느 편이 맞는 지 잘 몰랐는데, 여기와서 보니 애리조나라고들 한다. 현지인의 명칭을 존중한다는 면에서 애리조나가 무난한 것 같다. 아리조나라는 표기도 이 노래가 남긴 영향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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